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 화제작…2∼3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첫선
응우옌 연출 "불공정 노동과 자본 논리, 장인의 예술 세계 동시에 다뤄"
연극 '라크리마' [성남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성남=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당신네들은 우리 인도 장인들의 최고 품질 물건을 원하면서도 저렴한 단가, 빠른 납기일, 보안을 원하고 이제는 윤리 규정까지 맞추라고 하죠. 그 규정은 당신들이 런던 사무실에 앉아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던가요?"
영국 공주의 웨딩드레스에 쓰일 자수를 주문받은 인도 뭄바이 장인들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자부심에 최선을 다하지만, 왕실의 무리한 요구에 결국 한계에 이른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의 화제작, 연극 '라크리마'가 한국에 왔다.
지난 2일부터 경기 성남아트센터에서 이틀간 공연하는 작품은 화려한 글로벌 패션 산업의 뒤에 숨겨진 이름 없는 이들의 눈물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제목 '라크리마'(lacrima)는 라틴어로 '눈물'을 뜻한다. 2024년 초연 이후 프랑스 아비뇽페스티벌 등 세계 주요 무대에 올라 호평받았으며 이번이 한국 초연이다.
작품을 쓰고 연출한 캐롤린 기엘라 응우옌은 성남아트센터를 통한 인터뷰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연극 '라크리마' [성남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의 의도대로 '라크리마'는 영국 왕실의 웨딩드레스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과 피땀을 흘렸는지를 찬찬히 짚어본다.
무대 한쪽의 스크린을 통해 프랑스 파리의 작업실, 알랑송의 레이스 공방, 인도의 자수 공방을 분할 화면으로 동시에 비추며, 세계 각지에서 24시간 쉬지 않고 진행되는 제작 과정을 재현했다.
역사적 드레스의 제작을 맡게 된 이들은 모두 감격스러워하며 최선을 다해 작품을 남기려 하지만 작업은 쉽지 않다.
제작 기법도 남아있지 않은, 박물관에 전시된 레이스를 복원해야 하고, 수십만 개의 진주를 일일이 꿰어 수놓아야 한다. 100년간의 비밀 유지와 철통 보안을 요구하는 왕실 탓에 작업자를 늘리지도 못하고 가족들에게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다.
연극은 웨딩드레스에 대한 기대와 자부심으로 부푼 작업자들의 모습부터, 이들이 무리한 노동 과정에서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모습까지 비췄다.
파리의 의상 제작실 수석 '마리옹'은 무리한 기한과 왕실의 요구에 시달리다가 쓰러지고, 가족과의 관계도 멀어진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빛나는 알랑송 레이스의 장인인 '테레즈'는 하루에 16시간씩 레이스에 매달리다가 눈이 멀고 몸이 뒤틀려버린 부모님 세대를 회상한다. 이 과정에서 극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을 위해 작업장이 청각장애인들을 고용해 착취한 어두운 과거가 드러난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인도의 자수 장인 '압둘'은 드레스 완성을 앞두고 녹내장 판정을 받음과 동시에, 한두 달 안에 눈이 완전히 멀어버릴 것이라는 선고를 받고 '글로벌 윤리 규정'에 따라 작업에서 이탈한다.
연극 '라크리마' [성남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세기의 드레스를 만드는 것은 분명 영광스러우며 예술적 가치를 지닌 일이지만, 무대 밖에서 눈물 어린 과정을 따라가는 관객은 이 모든 일이 공주가 20분 남짓 착용할 베일을 위해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헛웃음을 짓게 된다.
다만 작품은 단순히 '노동 착취'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라크리마'는 건강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가는 장인들의 모습과, 그들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예술의 극치를 동시에 조명한다.
응우옌 연출은 이를 두고 "'부자들의 물건을 만들기 위해 일하는 이 불쌍한 사람들을 보세요'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며 "최고 장인들의 자부심과 경지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불공정한 노동 시스템과 자본 논리를 다룬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압둘의 딸이 압둘에게 하는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딸은 빠듯한 기한과 비밀 유지 규정 때문에 전화를 받지 않는 아빠에게 메시지를 남기며, "돈은 필요 없다. 일도 좋지만 아빠가 누구를 위해 일을 하는지 생각해달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딸은 "세계의 화려한 드레스들을 아빠가 만들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자랑스러워한다. 장인들의 예술과, 그 예술을 피워내기 위한 노동에서 받는 고통의 아이러니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응우옌 연출은 "개개인이 살아가는 체계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들의 복잡성을 존중하고 보존하고자 했다"며 "작업자들을 단순한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아니라 지식과 자부심, 가족과 욕망을 가진 캐릭터로 봐 달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