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도리
문성해
신생아들은 보통 아랫도리를 입히지 않는다
대신 기저귀를 채워 놓는다
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수술을 했을 때도
아랫도리는 벗겨져 있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아기처럼 조그마해져선 기저귀 하나만 달랑 차고 계셨다
사랑할 때도 아랫도리는 벗어야한다
배설이 실제적이듯이
삶이 실전에 돌입할 때는 다 아랫도리를 벗어야 한다
때문에 위대한 동화작가도
아랫도리가 물고기인 인어를 생각해내었는지 모른다
거리에 아랫도리를 가린 사람들이 의기양양 활보하고 있다
그들이 아랫도리를 벗는 날은
한없이 곱상해지고 슬퍼지고 부끄러워지고 촉촉해진다
살아가는 진액이 다 그 속에 숨겨져 있다
신문 사회면에도
아랫도리가 벗겨져 있었다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걸 보면
눈길을 확 끄는 그 말 속에는 분명
사람의 뿌리가 숨겨져 있다
신생아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아랫도리에 기저귀를 찬다
전철을 타고 가다 보면 사람의 시선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맞은편에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이 앉아 있다. 치마를 짧게 입고 나왔으면서도 자꾸만 손으로 옷자락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드러내고 싶은 마음과 감추고 싶은 마음이 한 몸 안에서 밀고 당긴다.
장옥관 시인은 문성해의 시 「아랫도리」를 읽으며 바로 이 장면을 떠올렸다.
“입을 때의 마음은 어딜 가고 당기는 마음은 어디서 생겨났는가.”
치마를 짧게 입고 나왔으면서도 자꾸만 손으로 옷자락을 아래로 끌어당긴다우리는 평생 몸을 가리며 살아간다. 특히 몸의 가장 낮은 곳, ‘아랫도리’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하고 예의와 규범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성해 시인은 우리가 그렇게 감추려 하는 곳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신생아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기저귀를 찬다. 아이를 낳기 위해 수술대에 오를 때도 아랫도리를 벗는다. 늙어 병원에 누웠을 때도 다시 기저귀를 찬다. 사랑하는 순간에도 옷을 벗는다.
태어남과 사랑과 배설과 죽음.
인간이 가장 실제적인 존재가 되는 순간마다 몸의 가장 낮은 곳이 드러난다. 그래서 시인은 단정적으로 말한다.
“삶이 실전에 돌입할 때는 다 아랫도리를 벗어야 한다”
이 한 문장이 시의 중심을 단단하게 붙잡는다.
생각해보면 병원만큼 이 말이 실감 나는 장소도 없다. 산부인과의 분만실과 수술실에서는 한 생명이 세상으로 나온다. 병동의 어느 침대에서는 노인이 기저귀를 찬 채 마지막 시간을 견딘다. 한쪽에서는 태어나기 위해 벗고, 다른 한쪽에서는 떠나기 위해 벗는다. 인간이 평생 애써 갖추었던 체면과 직함과 옷가지가 그곳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한다.
시인은 옷 아래를 본다. 그 아래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연약한 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거리로 나오면 사정은 달라진다. 사람들은 다시 옷을 입고 걷는다. 좋은 옷을 입고, 직함을 달고, 표정을 갖추고 “의기양양 활보”한다. 하지만 시인은 옷 아래를 본다. 그 아래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연약한 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아랫도리’는 단순한 신체 부위가 아니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자리이며 생명이 시작되고 흘러나오고 다시 소멸하는 자리다.
시인은 그것을 ‘사람의 뿌리’라고 부른다.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 숨어 있듯 사람의 뿌리도 가장 낮고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우리는 꽃과 잎은 자랑하면서 뿌리는 감춘다. 그러나 꽃을 피우는 힘은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올라온다. 문성해가 말하는 “살아가는 진액”도 결국 그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전철이 다음 역에 멈춘다. 사람들이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치고 문밖으로 빠져나간다. 다시 모두 말끔한 사회인이 된다. 누구는 회사로, 누구는 학교로, 누구는 병원으로 간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 옷 아래에는 감추어진 한 사람의 뿌리가 함께 간다.
태어날 때 처음 드러났고
사랑할 때 다시 드러나며
늙고 병들어 마지막에 또 드러나는 곳.
문성해의 「아랫도리」를 읽고 나니 사람의 가장 낮은 곳이 오히려 삶의 가장 깊은 곳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꼭꼭 감추고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꽃과 잎은 자랑하면서 뿌리는 감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