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
이성복
우리가 헤어진 지 오랜 후에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잊지 않겠지요 오랜 세월 귀먹고 눈멀어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알아보겠지요 입술은 그리워하기에 벌어져 있습니다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닫히지 않습니다 내 그리움이 크면 당신의 입술이 열리고 당신의 그리움이 크면 내 입술이 열립니다 우리 입술은 동시에 피고 지는 두 개의 꽃나무 같습니다
남아메리카 정글의 입술꽃
이렇게 요염한 식물이 또 있을까.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듯한 입술, 금방이라도 누군가에게 입맞춤을 건넬 것처럼 살짝 내민 도톰한 입술.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입술을 빼다 박았다. 그녀의 입술이 관능적인 아름다움의 상징이라면, 남아메리카 정글의 입술꽃은 자연이 빚어낸 가장 대담한 유혹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 입술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등의 열대우림에서 자라는 ‘사이코트리아 엘라타(Psychotria elata)’라는 식물이다. ‘후커스 립스’, 곧 ‘창녀의 입술’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별명까지 얻었다. 자연이 만든 입술치고는 여간 대담한 것이 아니다.
정글 한가운데서 이런 입술과 마주친다면 어떤 기분일까. 나뭇잎 사이로 붉은 입술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내밀고 있다. 숲이 사람에게 보내는 은밀한 신호 같기도 하고, 오래전 헤어진 연인이 미처 건네지 못한 입맞춤 같기도 하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에서도 이 독특한 식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안젤리나 졸리의 도톰한 입술을 연상시키는 이 식물은 붉고 탐스러운 입술 모양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안젤리나 졸리안젤리나 졸리의 입술이 영화 속에서 사랑과 욕망을 표현한다면, 정글의 입술꽃은 제 몸을 열어 생명을 불러들인다.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꽃이 피어나는 순간, 유혹은 비로소 생명의 일이 된다.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있다. 우리가 입술이라고 생각하는 붉은 부분은 꽃잎이 아니다. 꽃을 감싸고 보호하는 변형된 잎, 곧 포엽(苞葉)이다. 이 포엽이 서로 맞닿아 마치 두툼한 입술처럼 보이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굳게 다물었던 붉은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고, 그 사이에서 작고 하얀 꽃들이 피어난다.
이성복의 시에서 입술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다. 헤어진 뒤에도 상대를 기억하는 감각이며, 세월이 흘러 눈과 귀가 제 기능을 잃더라도 끝내 사라지지 않을 그리움의 자리다.
시인은 입술이 그리워하기 때문에 벌어져 있다고 말한다. 입술을 벌린다는 것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려는 몸짓일 수도 있고,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건네는 입맞춤의 준비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입술이 닫히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두 사람의 입술을 두 그루의 꽃나무에 비유한 마지막 대목이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한쪽의 그리움이 다른 쪽의 입술을 열게 한다는 발상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몸을 가졌지만 그리움의 순간만큼은 하나의 생명처럼 움직인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입술을 열듯, 식물은 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입술을 연다.
식물은 왜 하필 입술을 닮았을까. 벌새와 나비 같은 꽃가루 매개자를 유인하는 데 이 붉은 구조가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물의 세계에서도 누군가를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몸짓이 필요한 모양이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입술을 열듯, 식물은 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입술을 연다. 인간의 입술이 사랑의 언어라면 식물의 입술은 생존의 언어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불러들인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남아메리카의 입술꽃도 그런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붉은 입술이 열리면서 그 안에 감추어 두었던 꽃을 내보이는 모습은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온 말을 비로소 꺼내는 순간과 닮았다.
생각해 보면 입술만큼 많은 일을 하는 신체 기관도 드물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말을 한다. 웃고 울고 노래하고 때로는 거짓말도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는 곳도 입술이고, 이별을 통보하는 곳도 입술이다. 누군가를 살리는 말도 입술에서 나오고, 누군가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기는 말도 입술에서 나온다.
그런데 정작 가장 깊은 사랑은 입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전해지기도 한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다가서는 순간, 입술은 언어보다 먼저 마음을 알아차린다.
입술은 말의 출입구이면서 침묵의 마지막 문이다.
우리 입술은 동시에 피고 지는 두 개의 꽃나무 같습니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은 짧지만 그 감각은 오래 남는다. 세월이 흘러 얼굴이 희미해지고 목소리가 잊혀도 어떤 입술의 기억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성복의 시가 말하는 그리움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몸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 사람을 기억하는 감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정글의 입술꽃을 다시 들여다본다.
붉게 다문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고 있다. 그 안에서 작고 하얀 꽃들이 세상을 향해 얼굴을 내민다.

꽃은 입술을 열어야 피어난다. 사람은 때로 입술을 다물어야 사랑을 지킨다.
누군가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어쩌면 우리 가슴속에도 아직 피어나지 못한 입술꽃 한 송이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입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전설적인 록 그룹 롤링 스톤스의 보컬 믹 재거도 떠오른다. 공연 중 혀를 내미는 그의 도발적인 이미지와 두툼한 입술은 록 음악의 자유분방함을 상징했다.
1970년 영국의 젊은 디자이너 존 파시(John Pasche)는 롤링 스톤스의 의뢰를 받아 붉은 입술 사이로 혀를 내민 로고를 디자인했다. 이 로고에는 믹 재거의 입술뿐 아니라 힌두교 여신 칼리의 이미지와 기존 권위에 대한 저항 정신도 반영되었다. 1971년 앨범 《스티키 핑거스(Sticky Fingers)》에 사용된 뒤 오늘날까지 롤링 스톤스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전설의 록 그룹 ‘롤링 스톤스’의 보컬 믹 재거는 공연 중 혀를 내미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이런 행동을 본 떠 디자이너 존 파시(John Pashe)는 붉은색의 ‘혓바닥 로고’를 만들어 내고, 이같은 이미지는 1971년 앨범의 표지 자켓으로 일러스트된 이후 ‘롤링 스톤스’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전설의 록 그룹 ‘롤링 스톤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