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정 시조 시인의 〈인연〉은 세월과 인연, 그리고 헐거워지는 인연의 이치를 해학적이며 인문학적 깊이로 쓰여진 시조다.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따라 가는 길
씨줄 날줄 얽힌 연, 세월 속 헐거워져
베바지 방귀 빠지듯 슬슬 빠져 나간다
한 시절 고운 인연 무지개 탔었는데
인연도 수명 다해 달 같이 뜨고 진다
인연들 머문 자리에 향기는 남았구나
인연 (因緣) / 권오정
사람이 살며 맺는 연(緣)의 관계를 천틀 위에서 짜는 직물처럼, 네 마음의 씨줄과 내 마음의 날줄이 얽혀 하나의 삶의 옷감으로, 화사했던 시절의 옷감이 알록달록 무지개 빛깔을 띠며 세상을 다 덮을 듯 화려했지만, 천하의 으뜸이었던 만남의 찬란함도 잠시다. 세월이라는 장대비와 세파의 찬바람에 삭지 않는 섬유가 어디 있겠는가. 권오정 시조 시인은 그 숭고하고도 서글픈 이별의 순간을 가식 없이 ‘베바지 방귀 빠지듯 슬슬 빠져나간다’는 해학적인 비유로 인연을 간파했다.
꽉 들어차 팽팽하던 베바지, 오래 입어 느슨해진 실밥과 옷감, 들고 난 바람 사이 아무도 모르게 새어나간 인연은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얼(素顔)같은 것, 억지로 잡으려 손을 내밀어도 기어코 빠져나가는 인연의 뒷모습을 거창한 절규나 눈물로 호소하기 보다 그저 ‘피식’ 하고 새어나가는 베바지 속, 소리 없는 허탈한 공기로 풍자했다.
결국 인연이 풀리는 것을 거창한 배신이나 파국으로 치부하기 보다, 그저 헐거워진 세월에 바람이 통하는 이치로 어찌 세상 사람들은 헐거워진 옷깃을 억지로 꿰매려 바늘질을 해대다 서로의 살점을 찌르는 형국을 매몰된 암묵적 "향기"로 치환하여 승화시킨 칠언절구식의 시조로 시조의 맛과 운치를 서글픈 해학으로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권오정 시조 시인의 '인연'은 헐거워진 옷깃 사이로 시원한 바람 한 줄기 지나가게 놓아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한때 화사했던 무지갯빛 옷감을 함께 짜낸 이에 대한 가장 깊은 존중이자 은은한 "향기"로 작품에 풍미를 더했다. _ 평론 이원희
권오정 시조 시인
권오정
한국매일뉴스 문화부장 기자
《문학평론》신인문학상 수상, 홍조근저훈상(2015)수상 외 다수 [시집 꽃이 진다고 어찌 너를 잊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