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이유

인문학이 위기라 한다. 이미 진부해져 버린, 하지만 나름대로는 심각한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거론하고자 한다. 진부해졌다 함은 그토록 많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함은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 연구자 및 관련 종사자만의 그것이 아닌 한국 사회 전반의 위기를 경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헌 헌법의 기초자인 유진오박사 초안 원고. 유진오박사는 우리의 헌법이 ‘민족의 역사적 산물’ 이라고 주장하지만 처음부터 인문학적 논의가 배제된채 만들어진 헌법에 우리 삶과 역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고민이 담겨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과연 인문학의 위기는 경제적 지원 부족에서 비롯된 문제인가? 아니면 인문학 관련 학과에 지원하는 학생수가 적어서 생겨난 폐과 위기에서 나온 외침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양가적이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인문학 연구자의 연구 여건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고, 이러한 현실은 많은 연구자로 하여금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서도록 압박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인문학자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욱 난감한 형국이다. 인문학 역시 한국 사회 전체의 영향과 조정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더 나은 직업 기회를 찾아서 법대나 의대로 전과하는 학생에게 인문학이 좋으니 공부하라고 설득할 수는 있지만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지켜준 ‘학과’라는 제도적 강제가 제거됨과 함께 인문학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실은 알고 있었으나, 설마 하며 방심했던 부분도 없지 않았으리라.
외형만 성장…교양 결핍의 시대
그렇다면 인문학의 학문적 효용과 역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내적으로 성장했단 말인가? 인문학이 생물학적 사망 선고를 받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내적으로 진화했단 말인가? 이는 인문학의 학적 존립 근거와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 사회는 근본적으로 인문학을 필요치 않을 정도로 내적 진화 상태에 도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문학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시점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사건-사고 현상이 인문학을 더욱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기에 그렇다.
비유컨대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은 이렇다. 요즈음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신체 발육 상태를 조사해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관찰된다. 신체 골격은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데, 내장 기관들의 성장은 매우 더디게 진행된다. 골격이 커지면 그에 맞추어서 내장 기관도 같은 속도로 성장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이렇게 성장 균형이 깨진 청소년 대부분은 성인병을 많이 앓고 있다고 한다.
이 비유를 한국 사회의 내적 진화 과정에 대입해보면, 신체 골격에 비유되는 외형적 성장은 선진국 수준에 이미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장 기관에 대응되는 정신의 진화 속도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는 실은 국가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사회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예컨대 부동산 광풍, 사교육 열풍, 도박 태풍, 한마디로 ‘싹쓸이-태풍’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 태풍의 진원지는 ‘인문교양의 결핍’이다. 근본적으로 ‘내’가 없어서고 ‘우리’를 키우는 정신의 자양분인 인문교양이 삶 안에서 제 역할을 못해서 생겨난 문제이다.
우리는 개항 이후, 식민시대, 6·25 사변, 군사 독재, 산업화, 민주화, IMF 사태, 지금의 FTA 개방에 이르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러한 격동의 역사는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우리 자신과 나 자신에 대해서 한 걸음 물러나 반성할 수 있는 겨를을 주지 않았다. 생존의 치열함과 경쟁의 냉혹함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이다. 한 숨을 돌리면서 자신과 삶을 돌볼 수 있는 여가(otium)를 가질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격동의 와중에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우리 역사에 등장한 후, 그 형식적 틀은 어느 정도 우리 역사에 착생한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양심적 시민, 민주투사, 실천적 지식인들의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 형식을 채워야 할 내용에 대한 인문학적 덕목과 가치에 대한 후속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어야 했는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는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대한민국 사회에 아직 본격적으로 뿌리 내린 학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역사적으로 냉철하게 보면, 대한민국은 건국 초기부터 인문학 부재의 사회일지도 모르겠다. 단적으로, 이 땅, 한반도에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 앞으로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제도 위에서 살아갈 때, 알고 있어야 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의 양식에 대해서, 즉 인문학적 덕목과 가치에 대한 논의에 기초해서 헌법이 제정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문학 부재의 대한민국 헌법
제헌 헌법의 기초자인 유진오 박사의 말을 먼저 들어보자.
“이번 신판도 부산서 미국(하버드대학 법학 도서관)까지 원고를 들고 다니며 참고서와 자료도 태무한 가운데 집필한 것이어서, 추고도 충분히 하지 못하였고 저자의 마음에도 미흡한 곳이 한두 개소(個所)가 아니나, 그래도 구서에 비하면 면목을 일신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중략) 그 외에 저자가 특별히 유의한 점을 적기한다면, 첫째, 대한민국 헌법은 몇몇 사람의 인위적 작위의 소산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한 역사적 산물이었다는 점을 밝히기 위하여 권두에 헌법제정의 유래를 첨가한 것, 둘째,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각장의 첫머리에 그 장 전반에 관한 이론적 해명을 될 수 있는 대로 첨가한 것, 셋째, 헌법운영의 실제지식을 얻게 하기 위하여 대한민국헌법 제정 이후의 정치경험과 우리나라의 신입법(新入法)을 될 수 있는 대로 집어넣은 것 등이다.”(‘신헌법해의’ 서 2쪽)
흥미롭게도, 유진오 박사는 대한민국이 헌법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한다. 이 주장이 물론 국가 계승의 관점에서 대한민국은 3·1독립정신과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발언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 대한민국 헌법의 내용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산물인지는 의심스럽다.
세가지 점에서 그렇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가 우리 역사의 산물인지 의심스럽고, 그 내용이 우리의 삶에 대한 고민과 반성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스럽다. 역으로 우리 삶에 대한 반성과 고민이 우리 헌법에 제대로 반영되어 있는지 또한 의심스럽다. 또한 헌법을 구성하는 주요 술어 대부분이 실은 인문학적 논의에 기초한 개념들임에도, 헌법 제정과 개정 과정에서 인문학적 논의는 처음부터 참여한 적이 없었다.
헌법도 우리의 삶을 위해 제정된 것이고, 그 삶의 주체인 인간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라면, 인간과 삶에 대한 앎을 총괄하는 인문학이 헌법 논의에 본격적으로 참여해야 함은 당연한 것임에도, 그렇지 못한 것은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제도적 규정이 헌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인문학 부재의 사회였을 것이다.
그러면 좋다. 한 번 보자. 해마다 수만에서 수십만의 학생들이 사법고시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고시 제도가 언제 도입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건국과 함께 고시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시 제도가 시행된 지 최소 50년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인재들이 그토록 법률 서적에 목을 걸고 공부하고 있다면, 적어도 지금쯤은 대한민국이 ‘법치국가’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결핍되어 있기에, 아직도 ‘싹쓸이’ 공화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인문학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결국 그래서 인문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인간과 삶에 대한 앎과 이 앎에 대한 앎을 총체적으로 반성하는 인문학으로 말이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인문 교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현대사회의 골간(骨幹)인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가 요청하는 인문학적 가치와 덕목을 인문학과 인문학자들이 제대로 제공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이제는 가져야 하지 않을까? 곧, 삶의 질을 높여주는 교양과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 제기가 인문학이 해야 할 소임이기에. 근본적으로 ‘존재’란 무엇인가? ‘나’란 누구인가? ‘너와 나, 우리’는 누구이고, 어떤 관계인가? ‘개인’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공동체’는 어떻게 ‘개인’과 양립할 수 있는가? 등의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이 행복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가?’ 등의 ‘인문학적 웰빙’에 대한 고민이 이제는 한국 사회의 토론광장 중심에 서야 하는 물음이 아닐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의 방식’에 대한 기준과 척도 역할, 혹은 전범(典範) 역할을 하는 고전(古典)에 대한 논의와 특정사물과 특정사건에 대한 분과지식이 아닌, 인간과 삶에 대한 ‘앎과 실천’ 전반을 다루는 종합학문으로서 인문학을 포괄적으로 접근해야 될 때가 지금이 아닐까? 인문학의 위기를 넘어서 인문한국(人文韓國)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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