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영화 ㉟] 첫사랑은 왜 늘 끝난 뒤에야 완성되는가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7-28 06:42

그 여자에게 내 맘을 다 뺐겼다

열여섯의 그녀에게 내 맘을 다 뺐겼다

이제 막 겨우 꽃 피기 시작한 오이순 같은 그대에게

내 마음의 닷 마지기 땅을 다 빼앗겼다 ―장석남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표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러니까 그 사랑의 모든 시간들은 다 꽃그늘 속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떤 뛰어난 기억력도 사랑의 기억만큼은 온전히 복원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다시 회상해 낼 수 없는 것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것이고, 다시 오지 않는 것이다. 그저 단 한 번 지나간 일일 뿐이다.

단지 가슴을 떨었다든지 하는 정도의 기억일 뿐이다. 그 가슴마저도 지금은  다른 것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활짝 핀 꽃그늘 속이란 늘 그 속에 있을 때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이성을 잃는 것이며 그 밖으로 나오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그런 곳이 아니던가. (장석남, 산문 중에서)


장석남의 시인은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보다 이미 빼앗겨 버린 마음을 먼저 말한다. 첫사랑은 사랑을 얻는 일이 아니라 자기 안의 가장 넓은 땅을 기꺼이 내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만 영화《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포스터

2011년 대만에서 개봉해 아시아 전역을 첫사랑 열풍으로 물들였던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도 빼앗긴 마음의 기록이다. 사고뭉치 커징텅은 반듯하고 공부 잘하는 션자이를 좋아한다. 그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지만, 정작 가장 좋아했던 커징텅은 끝내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함께 웃고 다투고 엇갈리는 학창 시절은 그렇게 서툰 사랑의 시간으로 흘러간다.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두 사람이 풍등을 날리는 밤이다. 커징텅은 겨우 용기를 내 “널 좋아한다”고 말한다. 션자이가 대답하려는 순간 그는 말을 막는다. “지금처럼 널 좋아하게 해줘.” 고백은 했지만 대답은 듣지 않는다. 거절당할 용기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대답을 듣는 순간 지금의 설렘마저 끝날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는 것보다 좋아하는 마음 자체를 오래 붙들고 싶은 감정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방식도 달랐다. 커징텅은 션자이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어 격투기 시합에 나가지만, 션자이는 그런 행동을 철없는 허세로 받아들인다. 영화는 “어른이 되어 갈수록 여자는 남자보다 조금 더 빨리 성숙하고, 그 성숙함을 견딜 남자는 많지 않다”는 씁쓸한 독백을 남긴다. 사랑이 끝난 이유는 누군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가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감독 구파도의 실제 첫사랑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특별한 사건보다 교실, 시험, 장난, 운동장 같은 평범한 풍경을 오래 붙잡는다. 첫사랑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던 아주 사소한 일상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한국 리메이크작도 나와 2025년 2월 21일에 개봉된 바 있다.


 리메이크작《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장석남은 산문에서 “사랑의 모든 시간들은 다 꽃그늘 속”이라고 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세상 무엇도 보이지 않지만, 그 밖으로 나오고 나면 정작 무엇이 있었는지 선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시간. 영화 역시 꽃그늘을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이야기다. 결국 첫사랑은 이루어졌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마음속에 남아 있는가로 기억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때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했던 자기 자신을 그리워하게 된다. 첫사랑은 사람보다도, 그 사람을 바라보던 그 시절의 나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이름이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순수하고 달콤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기에 더욱 아름답다. 하지만 인생을 과거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얼마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나이가 들어버린 사람이 다시 젊어질 수는 없겠지만 순수한 첫사랑 그 시절의 감정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저물무렵


안도현


  저물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득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른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애와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개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여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애와 내가 걸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애와 같이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박상봉 사회부장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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