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200년 라일락 아래서 되살아난 대구의 기억 권도훈 신간 『봄이 오면 꽃은 다시 핀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8-08 14:31

폐가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라일락뜨락1956’ 2,900일의 기록

이상화 생가터 지번 추적하며 원도심에 묻힌 근대문화사까지 복원

대구 중구 서문로 복합문화공간 ‘라일락뜨락’에 해마다 봄이 오면 연보랏빛 꽃을 밀어올리는 200년 된  라일락 나무

한 그루의 나무가 한 사람을 불러 세우고, 한 사람의 발걸음이 한 도시의 잊힌 역사를 깨웠다.


대구 중구 서문로의 막다른 골목.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한옥 마당에는 오래된 라일락 한 그루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땅에 박힌 뿌리를 뽑아 승천하려다 그대로 굳어버린 용처럼 보이는 나무였다. 봄이면 늙고 뒤틀린 몸에서 어김없이 연보랏빛 꽃을 밀어 올린다.


시각디자이너이자 수채화가, 문화기획자인 권도훈 작가의 신간 『봄이 오면 꽃은 다시 핀다』는 바로 이 나무에서 시작한다.


책은 저자가 폐가나 다름없던 한옥을 매입해 복합문화공간 ‘라일락뜨락1956’으로 되살리고, 그곳에서 8년, 2,900여 일을 살아낸 기록이다. 그러나 몇 장을 넘기고 나면 이 책이 한 문화공간의 탄생과 운영을 기록한 평범한 회고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옥의 문을 여는 순간 그 아래 잠들어 있던 대구 근대사의 문까지 함께 열렸기 때문이다.


“절대 가지 하나라도 건드리면 안 됩니다”


처음 집을 보러 갔을 때 부동산 중개인은 마당의 고목부터 걱정했다. 당장 베어내야 할 골칫거리라는 투였다.


그러나 권 작가의 생각은 달랐다.

“제가 저 나무 하나 때문에 이 집에 왔는데요. 절대 가지 하나라도 건드리면 안 됩니다.”


집은 폐가 수준이었지만 서까래와 대들보는 살아 있었다. 무엇보다 마당 한가운데의 라일락이 오랜 시간을 견디며 집을 붙잡고 있었다. 권 작가는 집을 헐어버리는 대신 고쳐 쓰기로 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상량문에 ‘1955년’이라는 기록이 발견됐지만, 발음과 공간의 이름을 고려해 이듬해인 ‘1956’을 택했다. 그렇게 1956년에 지은 한옥 뜨락에 라일락이 있는 공간, ‘라일락뜨락1956’이 태어났다.


화가이면서 30여 년간 시각디자이너의 길을 걸어온 권도훈 작가는 라일락뜨락 한켠에서 틈틈이 그림 작업에 몰두한다.

권 작가는 이곳을 단순한 카페로 머물게 하지 않았다. 전시와 공연, 강연과 만남이 이어지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문을 열었다. 지역 예술인들이 모였고 시민들이 골목을 찾아왔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의료진에게 ‘희망 커피’를 지원했고 지역 예술인들과 무관객 콘서트를 열었다.


그 활동으로 대구광역시장 표창을 받았으며, 오래된 공간의 역사적 가치를 살려낸 공로로 제1회 미(美)터상 최우수상과 제23회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는 그다음부터다.


담장에 붙은 작은 푯말 하나가 역사를 흔들다


집을 처음 찾았을 때 골목 입구에는 ‘민족시인 이상화 생가터’라는 낡은 푯말이 붙어 있었다. 권 작가는 처음에는 자신이 매입한 11-3번지를 이상화 생가의 옆집 정도로 생각했다. 알려진 자료들 역시 이상화 생가를 ‘서문로 2가 11번지’ 또는 ‘12번지’ 등으로 제각각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골목에서 만난 이웃의 한마디가 의문을 키웠다. 옛날 이상화 생가터를 알리던 푯말이 원래 자신의 집 대문에 붙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한옥이 문화재로 지정될 것을 염려한 집주인이 푯말을 옆집으로 옮겨 달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때부터 권 작가의 추적이 시작된다.

문헌을 뒤지고 구청 자료를 확인했다. 1910년대와 1950년대의 지적도를 대조하고 일제강점기 토지대장을 찾아 소유권 변동까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1920년대에는 11번지와 12번지로 나뉘어 있던 땅이 이후 세분화됐고, 11번지는 11-1·11-2·11-3·11-4번지로 갈라졌다. 토지대장에는 백부 이일우를 시작으로 이상화와 그의 형 이상정 장군의 이름까지 남아 있었다. 흩어진 지번과 서로 충돌하던 기록들이 오래된 지도 위에서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의 작업은 결국 2019년 대구시에 관련 정보를 바로잡아 달라는 민원 제안으로 이어졌고, 이상화 생가터를 알리는 안내판도 수정·보완됐다.


 권도훈 작가는 관련 문헌과 지적도 등 사료를 꼼꼼히 찾아보면서 이상화 생가터가 라일락뜨락임을 증언하고 있다.

책에서 말하는 ‘공간 재생’이 낡은 건물을 예쁘게 고치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 이유다. 건물을 살리는 데서 시작해 그 터의 기억까지 복원하는 작업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상화 한 사람을 좇았더니 대구 근대사가 따라왔다 


권 작가의 발걸음은 이상화에게서 멈추지 않는다. 자료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화의 형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상정 장군을 만나고, 다시 우현서루에 닿는다. 우현서루는 이상화의 조부 금남 이동진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근대 교육기관이자 도서관이었다. 국내외 서적 1만여 권을 갖추고 청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인재를 길러낸 곳으로, 대구·경북지역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그곳을 거쳐 간 인물들의 면면도 대구 근대사의 축소판에 가깝다. 이상화·이상정 형제를 비롯해 권일제, 여운형, 김성수 등이 우현서루와 인연을 맺었다. 이렇게 한 골목의 지번을 확인하기 위해 시작된 조사는 자연스럽게 대구의 독립운동과 교육운동, 문학과 미술의 역사로 확장된다.


책의 2부가 이상화뿐 아니라 현진건, 이인성, 서동진 등 대구 근대 인물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의 삶은 골목과 연결되고, 골목은 도시와 연결되며, 한 사람의 흔적은 결국 한 시대의 지도가 된다.


대구 원도심의 오래된 골목에서 문화공간 재생과 향토사 발굴에 힘써온 권도훈 작가가의 신간『봄이 오면 꽃은 다시 핀다』출간을 기념하는 북토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들’은 어디였을까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이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공간을 추적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달성공원의 ‘상화시비’, 수성못 상화동산, 앞산 보리밭 등 이상화와 관련된 장소와 자료를 따라간다. 흔히 시 속 ‘빼앗긴 들’을 수성못 일대와 연결해 생각하지만 저자는 다른 기록을 제시한다. 이상화의 아우 이상백이 남긴 글과 당시 부지 연혁, 향토사 자료 등을 살펴 시인이 산책하던 앞산 보리밭에 주목한다.


현재 캠프워커가 자리한 앞산 아래 보리밭 일대는 1921년 일제가 강제로 징발해 일본군 경비행장과 군사시설을 조성했던 곳이다. 고향의 흙이 군사기지로 바뀌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경험이 1926년 발표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구체적인 모티브가 됐을 가능성을 추적한다. 저자는 시를 문학작품 안에 가두지 않고 시가 태어난 실제 공간으로 다시 데려간다. 문학의 문장을 지리와 역사 위에 겹쳐 읽는 셈이다.


나무의 나이는 묻지 않기로 했다


이 모든 이야기의 한가운데에는 여전히 라일락 한 그루가 서 있다. 저자는 이상화와 이 나무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관련 문헌과 회고담을 뒤지고 나무의 수령까지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정확한 나이를 측정하려면 생장추를 이용해 나무에 구멍을 내야 했고, 이미 몸이 심하게 뒤틀린 노거수에는 위험할 수 있다는 답을 들었다.


결국 나이를 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처음 나무를 본 전문가의 추정대로 영원히 ‘200살’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 선택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과거를 알아내겠다는 욕심 때문에 현재 살아 있는 것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사를 지킨다는 일은 오래된 것을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 속에서 다시 숨 쉬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권도훈 작가 신간『봄이 오면 꽃은 다시 핀다』

그래서 『봄이 오면 꽃은 다시 핀다』라는 제목도 예사롭지 않다.


겨울을 견딘 라일락은 다시 꽃을 피우고, 폐가는 사람을 맞는 집이 됐다. 사라질 뻔한 골목의 기억은 기록이 됐으며, 잘못 적힌 지번은 오래된 지적도와 토지대장을 통해 제자리를 찾아간다.


저자 자신도 그 과정에서 달라졌다. 30여 년간 시각디자이너로 살아온 그는 다시 붓을 잡아 수채화가가 됐고, 공간을 운영하면서 문화기획자이자 향토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기록자가 됐다.


어린 시절 하얀 눈사람에 열두 색 크레파스를 칠했던 아이가 오랜 세월을 돌아와 이번에는 도시의 잊힌 기억에 색을 입힌 셈이다.


『봄이 오면 꽃은 다시 핀다』는 결국 한옥 한 채에 관한 책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들을 그냥 사라지게 두지 않은 한 사람의 기록이며, 한 그루의 나무에서 시작해 한 도시의 기억으로 뻗어나간 2,900일의 문화 실천기다.


개발의 속도가 기억의 속도보다 빠른 도시에서 오래된 집과 골목, 나무와 사람의 이야기를 지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 책은 묻는다.

200년 된 라일락은 해마다 늙은 몸에서 새순을 밀어 올린다.


꽃은 한 번 지지만 봄은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누군가 기억하는 한, 도시의 오래된 이야기도 다시 핀다.


권도훈 작가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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