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장소 54] 쥐뿔의 노래, 몸성히 잘있거라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10-09 15:03

우리 모두에게 외상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자주 가던 소주 집 영수증 달라고 하면

메모지에 ‘술갑’ 얼마라고 적어준다.

몸성히 잘있거라 


권석창


자주 가던 소주 집

영수증 달라고 하면

메모지에 ‘술갑’ 얼마라고 적어준다.

시옷 하나에 개의치 않고

소주처럼 맑게 살던 여자

술값도 싸게 받고 친절하다.

원래 이름은 김성희인데

건강하게 잘 살라고

몸성희라고 불렀다.

그 몸성희가 어느 날

가게문을 닫고 사라져버렸다.

남자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천사를 따라 하늘로 갔다는

소문만 마을에 안개처럼 떠돌았다.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몸 성히 잘 있는지

소주를 마실 때면 가끔

술값을 술갑이라 적던 성희 생각난다.

성희야, 어디에 있더라도

몸 성히 잘 있거라.


몸성히 잘있거나 권석창 시 박푸른숲 노래

https://youtu.be/62Vwm7UZN-8


이미지 사진. JTBC 드라마 여제의 한 장면

‘메모지에 술갑 얼마라고 적었다’는 말은 외상을 먹었다는 말. 그래 맞아, 우리 모두에게도 외상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린 월급날, 밀린 외상값을 갚고 나면 다시 외상을 살아야하는 시절이 있었다. 외상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적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행위. 좌우지간 ‘카드’라는 게 생기고부터 그게 싹 없어져버렸다. 그 옛날 외상은 곧바로 갚지 못하면 우물쭈물 얼버무리면 됐지만 요새 카드는 얄짤없다. 연체다 뭐다 하면 곧바로 신용불량자로 전락한다. 카드란 참말로 인간미 없는 물건 중에 하나다.


그나저나 이 시 속의 몸성희는 어떻게 됐냐고? 내가 수소문해서 알아봤는데 ‘천사가 되어 하늘로 갔다’는 말은 헛소문이다. 허수경의 시 「저무는 봄밤」에 나오는 봉천본동 그 여자애처럼, 하수도 치는 절름발이 늙다리 총각을 따라갔는데 지금은 초로의 여자가 되어 경상북도 저 위쪽 영주에 살고 있단다. 


잘 살지도 못 살지도 않고 뭐 그저 고만고만,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도 받고 공공근로도 나가고 그렇게 살고 있단다. 믿거나말거나……. 우리들이 정말로 좋아했던, 우리들을 정말로 좋아하던 몸성희! (유홍준 시인)


이미지 사진. 1997년 개봉 한국 영화 창(娼)의 스틸컷.

경북 영주에서 평생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며 시를 써온 권석창 시인의 별호가 쥐뿔이다. ‘쥐뿔’이 무슨 말인가? ‘쥐뿔도 없는 놈’의 그 쥐뿔에서 따온 말이다. 


권석창 시인의 필명이 ‘서각(鼠角)’이고 별명이 ‘쥐뿔’이 된 사연은 그가 80년대 우연히 ‘쥐뿔’이라는 시 한 편을 쓴 데서 연유한다. 그는 시인이라고 고고한 선비연 하는 것이 아니라 쥐뿔도 없는 사람이라고 자기를 한없이 낮춘다.


바로 그러한 자세로 그는 세상 속의 가슴 아리고 괴로운 우리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직히 노래한다. 시가 어렵지 않고 참 재미나고 쉽다. 그리고 따스한 감동을 잔잔히 불러일으킨다.

 ‘김성희→몸성희→몸 성히’로 변주되는 말의 웃음(fun)은 그의 두번 째 시집 『쥐뿔의 노래』 맨 뒤편에 실린 「밥·사설(辞説)」 「술·사설(辞説)」 「떡·사설(辞説)」에 오면 극에 달한다. 


시집을 읽다가 몇 번이나 소리내어 웃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웃음 또한 우리 보통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건져낸 건강한 해학들이다.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권석창 시인은 『눈물 반응』(둥지,1989), 『쥐뿔의 노래』(모아드림, 2005) 『노을의 시』(푸른사상, 2019)라는 세 권의 시집과 산문집으로 『그르이 우에니껴』, 논문집으로 『한국 근대시의 현실대응 양상 연구』 등이 있다. 

권서각(본명 권석창) 시인의 세 번째 시집『노을의 시』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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