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잔해가 만든 한국 방공무기의 오늘, 그리고 중동 하늘
LIG 넥스원
한국 방위산업의 발전사를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연결선 하나가 드러난다. 1990년대 초 러시아 부채 상환을 계기로 시작된 '불곰사업'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중동 하늘을 지키는 중거리 지대공 미사일 천궁-Ⅱ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냉전 해체의 부산물에서 출발한 기술 협력이 오늘날 한국 방위산업의 핵심 토양이 됐고, 그 결실이 국제 안보 환경 속에서 점차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러시아 부채에서 시작된 군사 협력
1990년대 초 구소련 붕괴 이후 경제난에 빠진 러시아는 한국에 진 차관을 현금 대신 무기와 군사 장비로 갚겠다고 제안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수용했고, 이 과정에서 T-80U 전차와 BMP-3 장갑차 등 러시아제 무기체계가 한국군에 배치됐다.
당시 서방 무기 중심 체계를 운용하던 한국군에게 러시아 장비는 낯선 기술 세계의 창문이었다. 특히 미사일과 방공 체계 분야에서 러시아가 보유한 기술 수준은 한국 연구진에게 새로운 기반이 되었고 이후 한국이 자체 방공무기 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 경험은 중요한 자료로 활용됐다.

기술 축적이 낳은 한국형 방공체계
그 기반 위에서 8개 발사관을 탑재한 발사대 차량 4대와 다기능 레이더, 교전통제 시스템(ECS)으로 탄생한 것이 중거리 지대공 미사일 천궁-Ⅱ다. 국방과학연구소(ADD)가 개발을 주도하고, LIG넥스원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체계 개발과 생산에 참여해 완성한 국내 독자 기술의 방공 시스템이다.
천궁-Ⅱ는 항공기는 물론 탄도미사일까지 요격할 수 있는 다기능 방공 시스템으로 평가받는다.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인 KAMD(Korea Air and Missile Defense)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았으며, 군 전력 강화와 수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사례로 꼽힌다. 패트리엇 같은 고고도 체계와 단거리 방공 자산 사이의 중간 고도를 담당하는 역할로, 다층 방공망의 빈틈을 메우는 핵심 자산이다.
중동 긴장 속에서 재조명된 실전 가치
최근 이란과 미국 동맹국 사이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중동 국가들의 방공망 강화 수요가 급격히 부각됐다. 이 과정에서 천궁-Ⅱ를 도입한 아랍에미리트(UAE)의 방공 체계가 전략적 방패로 거론되며 한국 방공무기의 실전 가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현대 중동 분쟁에서 드론과 탄도미사일을 동시에 운용하는 복합 위협이 일상화된 가운데, 중동 국가들은 다층 방공망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천궁-Ⅱ는 그 가운데 중간 고도 방어를 담당하는 핵심 체계로 평가된다.
실전이 증명한 한국 방공무기
불곰사업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당시 축적한 기술과 운용 경험을 발판 삼아 독자적인 첨단 방공무기를 개발했고, 이제는 세계 방산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수출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 결실은 이미 실전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탄도미사일과 드론 수백 기를 동시에 발사한 공격에서, UAE에 배치된 천궁-Ⅱ는 역내 방공망의 일부로 작동하며 복합 위협 대응 능력을 입증했다. 단일 위협이 아닌 포화 공격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다층 방공망의 중간 고도를 안정적으로 담당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 장면은 세계 방산 시장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실전 검증은 어떤 사양서보다 강력한 마케팅이다. 천궁-Ⅱ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과 일부 유럽 국가들까지 한국 방공 시스템에 대한 문의와 관심을 높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산 업계에서는 이번 중동 사태가 천궁-Ⅱ의 국제적 신뢰도를 한 단계 끌어올린 변곡점이 됐다.
러시아의 부채 상환 수단이었던 전차와 장갑차가 한국 방산 기술의 씨앗이 될 줄은, 그 씨앗이 중동 분쟁의 하늘 위에서 결실을 맺을 줄은 당시 어느 누구도 내다보지 못했다. 작은 날갯짓이 거대한 바람을 만들어낸다는 나비효과의 정의가 이보다 잘 맞아떨어지는 사례도 드물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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