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들] 한국 건너와서 길 잃은 '제3의 길'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등록 2026-07-06 13:32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제3의 길(Third Way)은 유럽 좌파의 수정주의 노선이다. 복지와 평등이라는 사회민주주의의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성장과 경쟁의 시장경제를 적극 수용해 중도층으로 외연을 넓히고 집권의 길을 열자는 주장이다. 냉전 종식과 소련 붕괴로 사회주의 모델이 무너지면서 방향타를 잃은 유럽 좌파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제3의 길 블레어와 손잡은 노무현 대통령제3의 길 블레어와 손잡은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20일 오후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갖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김동진/정치/ 2003.7.20 (서울=연합뉴스) kimd@yna.co.kr


제3의 길을 정치적으로 구현한 인물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였다. 그는 노동당의 교조적 사회주의 노선을 과감히 수정한 '신노동당(New Labour)'을 내세워 시장경제와 복지를 결합하는 실용 노선을 추진했다. 블레어의 유연한 사회민주주의 전략은 1997년 총선 승리로 이어졌다. 노동당은 18년 만에 정권을 탈환하며 이후 고든 브라운 정부까지 13년을 집권했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실험이 이어졌다. 1998년 집권한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는 2003년 노동시장 유연화와 복지 개혁을 담은 '아젠다 2010'을 내놓았다. 독일은 이후 실업률이 크게 낮아졌고, 유럽 최대 경제국으로서의 경쟁력을 공고히 했다.


제3의 길은 좌파 정당에 축복만 안겨주지는 않았다. 시장친화 정책은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전통적 지지 기반인 노동계는 등을 돌렸다. 슈뢰더는 제3의 길 제창 2년 만에, 영국 노동당은 블레어 퇴임 후 3년 만에 정권을 내줬다. 제3의 길은 국가 경쟁력을 높였지만 정작 좌파 정당 자신들에게는 자책골이 됐다.


한국에서는 노무현 정권이 첫 시도를 했다. 복지와 균형발전을 확대하면서도 재벌 체제를 인정하고 한미 FTA를 추진했다. 민주화 세대와 호남의 지지로 집권했지만 산업화 세대와 영남 기반의 한나라당을 향해 대연정까지 제안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진보에는 배신자였고, 보수에는 위장된 좌파였다. 양쪽 모두의 신뢰를 잃은 노무현의 길은 부동산 가격 급등과 열린우리당 분열, 10년 집권 피로감이 겹치며 정권 교체로 막을 내렸다.


한 자리에 모인 여권 실세들한 자리에 모인 여권 실세들 (서울=연합뉴스) 신현우 기자 = 3일 서울 용산구 한 호텔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워크숍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민석 전 국무총리, 민주당 한병도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 한성숙 국무총리, 민주당 정청래 전 대표, 송영길 의원. 2026.7.3

nowwego@yna.co.kr


제3의 길이 다시 이재명 정부에서 소환되고 있다. 강훈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중도층을 품으려면 블레어식 제3의 길을 고민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정청래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측에서 "기회주의적 협잡"이라는 반발이 나왔다.


유럽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런 논쟁은 매우 낯설게 보일 것이다. 유럽에서 제3의 길은 좌파가 시대 변화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를 놓고 벌인 치열한 노선 경쟁이었다.


반면 지금 여권 내 갈등은 친문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보수 인사 중용 등 권력 운용을 둘러싼 계파 간 이해관계가 그 바탕에 있다. 국민은 물가와 일자리, 저성장과 양극화를 걱정하는데 여당은 총선 공천권을 누가 행사할지, 차기 대권의 유리한 고지를 누가 선점할지를 놓고 다투는 모습이다.


'노무현 정신'의 일환이라는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 문제도 보통 사람들 눈에는 그저 당권 투쟁의 소재로 비칠 뿐이다. 경찰이 모든 수사권을 가졌을 때 민생과 성폭력, 고도의 경제범죄 대응에 혼란은 생기지 않을지가 국민에겐 훨씬 더 큰 관심사다.


어느 나라든 국민이 여당에 바라는 것은 삶의 변화일 것이다. 당권 향배를 두고 제3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다투기 전에 집권세력이 하나가 돼 국민이 체감할 성과를 내놨으면 한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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