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고] 60년을 건너온 트로이의 눈물,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고 -김명희 작가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8-09 18:53



김명희 작가


지난 4일, 우크라이나 헤르손의 한 재래시장에서 채소를 팔던 한 상인을 러시아 드론이 끝까지 뒤쫓아 폭발한 영상이 공개되어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전투원이라 볼 만한 어떤 징후도 없이, 그저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팔던 한 사람이었다. 승합차 뒤로 몸을 숨기고 방향을 바꿔 달아나 보아도 사람 머리만 한 드론은 집요하게 그를 따라붙었다. 


우크라이나 경찰은 이를 '인간 사냥'이라 규탄했다. 창과 활, 총과 포탄으로 이루어지던 전쟁은 이제 하늘의 작은 기계가 개인을 표적으로 삼아 끝까지 쫓는 전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형태만 달라졌을 뿐, 쫓기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무력감, 그 원초적인 두려움의 심리는 트로이의 성벽 아래서든 오늘의 헤르손 시장 골목에서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뉴스를 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오늘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았다. 스크린을 나서는 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던 것은, 이 영화가  서사시의 영상화로 잘 만들었다기 보다 욕망의 세계와 자연 질서의 세계가 맞닿는 경계 지점을 정직하게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승리자의 눈물이었다. 트로이를 무너뜨린 자, 전쟁에서 이긴 자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도덕적 참회의 눈물이었다. 영웅의 여정이 결국 한 인간이 홀로 감당해야 할 무게로 되돌아오는 그 순간들 그것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여운이다. 


외로움, 갈등, 정체성에 대한 물음,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삶의 여정.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그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전쟁의 희생자들과 파괴된 문명 앞에 용서를 구하는 엔딩에 이르러서는, 나 역시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시간과 기억과 공간을 교차시키는 복합적인 서사 구조는 인물의 내면 심리를 그려내는 데 강한 공명을 일으켰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절제 있게,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배치한 균형감 덕분에 영화 속으로 더 깊이 끌려 들어갈 수 있었다.


인물의 감정과 고독, 갈등을 밀도 있게 파고들면서도 화면 곳곳에 여백을 남겨, 관객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할 여지를 준 연출은 역시 놀란다웠다. 대단한 감독이다.


이 영화를 통해 내가 읽어낸 인생의 파라다이스는 결국 사랑과 치유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세계사에서 동양사나 한국사보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더 열심히 배웠던 세대이면서도, 정작 신화(Myth)는 오래된 옛날이야기나 아이들을 위한 동화 정도로 여겨온 편이었다. 그런데 영화 한 편을 통해 문득 깊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는데, 오늘이 그러했다. 신화는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축적해 온 삶의 지혜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비유와 상징으로 응축해 놓은 집합체라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국립극장 무대에서.. (맨 오른쪽 김명희 작가 )

 사진 한 장이 그 깨달음을 더 오래 붙들어 두게 한다. 연극 「트로이의 여인들」, 이화여대 창립 기념 공연 무대의 한 장면이다. 꼭 60년 전, 국립극장 무대에 섰던 그 시절의 나는 사진의 오른쪽 끝에 서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배경으로, 트로이 전쟁에서 패한 뒤 포로로 끌려가야 했던 트로이 왕가의 여인들  오이노네, 헥토르, 카산드라, 헬레노스의 이야기였다. 그때는 몰랐었다. 60년 전의 무대 트로이에서 흘린 눈물과 , 대사로 외우던 그 슬픔이 오늘의 나에게 돌아올 줄은....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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