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서 '훈맹정음' 창안 박두성 선생, 오늘 63주년 추도식
박두성 선생 손자 "할아버지,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살아갈 힘 갖길 바라"
국가등록문화유산 '한글점자 「훈맹정음」 점자표 및 해설 원고'의 점자표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우연과 행운이 겹친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한글을 가르치는 것조차 달갑게 여기지 않던 일제강점기, 한 교사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새로운 문자를 세상에 내놓았다.
올해 100주년을 앞둔 6점식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창안한 송암 박두성(1888∼1963) 선생의 이야기다.
25일 박 선생의 생가가 복원된 인천 강화군 교동면에서는 그를 기리는 63주년 추도식이 열렸다.
손자 박현재(84) 씨는 추도식을 앞두고 "할아버지는 단순히 시각장애인이 글을 읽는 것을 넘어 배워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길 바라셨다"고 회고했다.
박씨에 따르면 박 선생은 지극히 우연히 시각장애인 교육과 인연을 맺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유화 정책으로 시각장애인 학교(제생원 맹아부)를 설립하면서 기독교인 교사를 추천받았는데, 당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 선생이 이름을 올렸다.
어려운 형편에 타향살이하고 있었던 박 선생은 맹아부 교사가 되면 관사를 지원받을 수 있다기에 선뜻 지원한 것이라고 박씨는 부연했다.
그렇게 맹인 교육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교육 활동을 하면서 한국 최초의 점자 교과서(일본어)를 출판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말 점자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엔 미국 의료 선교사이자 교육자인 로제타 셔우드 홀이 개발한 4점식 한글 점자(일명 평양점자)가 있었으나, 한글의 특성을 잘 반영하지 못해 한계가 뚜렷했다.
특히 1919년 3·1 운동 이후 식민 통치가 강화되면서 조선어 교육을 없애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박 선생은 더욱 절실하게 한글 점자의 필요성을 느꼈다.
박씨는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우습게 봤고, 장애인들은 더 심하게 생각했다"며 "그래서 할아버지가 일본인 교사들과 많이 싸웠다고 할머니에게 자주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박 선생은 1920년부터 한글 점자 연구를 본격화했고, 1923년 제자 8명과 함께 비밀리에 '조선어 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했다.
각막염에 걸려 실명할 뻔할 정도로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려 마침내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완성했고, 1926년 11월 4일 이를 세상에 내놨다. 이날은 한글날 기념식이 처음 거행된 날이기도 하다.
제생원 맹아부 교사 시절(사진 오른쪽) [송암 박두성 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훈맹정음 창안 사실은 조선총독부에 보고됐지만, 별다른 제지나 탄압은 없었다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박씨는 "한글 학자들이 잡혀가던 험한 시대였다. 우리도 고초를 겪을 수도 있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행운이었다"며 "시각장애인 교사 모집 공고가 우연히 조부 눈에 띈 것부터 일제가 한글 점자를 문제 삼지 않은 것까지 우연과 행운이 겹쳐 기적처럼 훈맹정음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박 선생은 성경과 문학작품, 역사책 등을 직접 점자로 번역해 전국의 시각장애인에게 전달하는 등 점자 보급과 교육에 평생을 바쳤다.
박씨도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도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할아버지 지시로 일반 책보다 몇 배나 두꺼운 점자책을 우체국에 들고 가 전국 시각장애인들에게 보냈다"며 "점자책은 우편 요금이 무료였는데, 할아버지는 제가 일을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영수증을 꼭 받아오라고 하셨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이어 "그땐 왜 이렇게 하시나 싶었는데 나이가 들어서야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셨는지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할아버지가 한글 점자를 만든 이유는 단순히 '읽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통해 '스스로 살아갈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고 박씨는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청각·지체장애인 등 모든 장애인이 단순히 지원받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박두성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1962년 국민포장을 수여했고, 1992년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1997년에는 한글 점자가 시각장애인의 공식 문자로 고시됐으며, 2020년에는 관련 자료가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됐다.
해부학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박두성 모습 [국가유산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