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인문학자' 보스트리지가 섬세하게 빚어낸 전쟁의 비극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등록 2026-08-27 17:15

세종솔로이스츠·윤한결과 '소년의 이상한 뿔피리' 등 말러 가곡 무대


세종솔로이스츠와 지휘자 윤한결,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세종솔로이스츠와 지휘자 윤한결,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세종솔로이스츠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구테 나흐트(Gute Nacht)!"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가 비통한 목소리로 '안녕히'라는 뜻의 인사를 고했다. 꺼져 가는 생명의 소리를 표현하듯이 타악기 연주가 잦아들었다.


악장이 끝나자 무대와 객석을 수십 초의 기나긴 정적이 휘감았다. 비극에 몰입했던 감정을 추스른 테너가 지휘자의 손을 잡자 그제야 객석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지난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영국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는 전쟁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가곡들을 섬세하고도 애달프게 소화했다.


이날 공연은 25일 개막한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의 첫 메인 프로그램으로 지휘자 윤한결과 '노래하는 인문학자'로 불리는 보스트리지가 악단 세종솔로이스츠와 협연했다.


보스트리지는 영국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철학 및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으로 유명하다. 그의 노래는 "단순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데 그치지 않고 청자에게 사유를 요구한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공연 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예술은 전쟁이라는 비극을 상상하고 그에 저항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세종솔로이스츠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날 공연된 '소년의 이상한 뿔피리'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동명의 민속 시집 내용을 가사로 차용해 만든 가곡집이다. 이 중 '아름다운 트럼펫 소리 울리는 곳' 등 전쟁터를 배경으로 삶과 죽음을 다룬 세 곡이 무대에 올랐다.


'아름다운 트럼펫 소리 울리는 곳'은 전쟁터의 병사가 연인의 곁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는 내용으로, 병사와 상상 속 연인인 소녀, 해설자의 대사로 이뤄진 독특한 곡이다.


다소 마른 체격에 큰 키를 지닌 보스트리지는 객석의 환호성에 수줍게 인사하며 등장했다.


그는 부드러운 서정적 선율에 맞춰 애수 어린 목소리로 '어서 와요 사랑하는 이여…'라며 연인을 맞이하는 소녀의 모습을 표현했다. '소녀가 연인을 안으로 맞이했다'며 눈물의 재회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잠깐 탄식하는 듯 한숨을 내쉬고 호흡을 멈췄다.


이어진 '북치기 소년'은 가곡집 중 가장 어두운 분위기를 지녔다. 감옥에 갇힌 북 치는 소년병이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보스트리지는 앞선 곡보다 음색을 한층 더 굵고 음울하게 바꿔 '교수대가 저리 높구나!'라며 공포에 질린 어린 고수(鼓手)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했다.


소년병이 '내가 누구인지 물으면 대대의 북치기였다 말해주오'라고 고별인사를 남기는 대목에서는 감정을 폭발시키듯 극한까지 몰아붙여 격하게 노래하다가, 이내 뒤를 돌아 마음을 추스르는 모습이었다.


이날 선보인 곡들은 음울하고 묵직한 극적 분위기로 주로 테너보다는 더 낮은 음역대의 바리톤·베이스가 부르는 곡이지만, 보스트리지는 차분하면서도 풍부한 표현력으로 무리 없이 노래를 소화했다.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세종솔로이스츠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부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연가곡은 사랑하는 이에게 거절당하고 정처 없이 떠돌다가 죽음에 이르는 청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중 '아침에 들을 거닐면'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며 찬양하는 내용이지만, 보스트리지의 노래에서는 찬양 속 쓰라린 화자의 내면이 느껴졌다.


새소리 같은 플루트와 활기 있는 현악기의 연주 속 신경질적인 화자의 자연 예찬이 이어지는 가운데, 보스트리지는 "아니, 행복은 다시는 피어날 수 없으리"라 예감하며 끝을 맺었다.


대미를 장식한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구슬픈 하프 소리가 비통한 장송 행진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푸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연인을 조용히 원망하는 가사로 시작했다.


보스트리지는 낮은 목소리로 고요한 밤과 어두운 황야를 건너는 여정을 묘사한 다음, 평온한 목소리로 '모든 것이 괜찮아졌네'라는 구절을 부르며 화자의 영원한 안식을 암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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