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장소 52] 조개가 등에 지고 온 바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9-28 13:41

파도를 품고 갯벌을 파고드는 힘으로 조개는 나이를 먹는다

바다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면 조개껍데기가 떠오른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 발그레한 명기와 예봉에 털까지 수북하게 돋아 있으니 뭇 사내들 군침 흘릴 수밖에

조 개


박경희


조개에도 나이테가 있다

파도를 품고 갯벌을 파고드는 힘으로

조개는

나이를 먹는다


손톱으로 건드리면

이내 몸을 닫아버리는, 쏜살같은

生


조개가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끝내 흩어 버릴 파도가 있기 때문이다


바다 끝으로 사라지는 통통배처럼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는 푸른 섬처럼

주둥이 꽉 다물고

오지게 나이만 먹고 있는

보드라운

조개!


조개가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끝내 흩어 버릴 파도가 있기 때문이다.바다에 가면 소금 냄새에 생선 비린내가 섞이고, 바람은 항구에 묶어둔 배와 그물과 사람의 옷자락을 차례로 건드린다. 방파제 안쪽에는 배들이 몸을 맞대고 출렁거리고, 어디선가 경운기 같은 엔진 소리가 털털거리며 들려온다. 바다는 눈으로 보기 전에 냄새와 소리로 먼저 와 있는 것이다.


항구에서 골목 쪽으로 몇 걸음 들어가면 오래 바닷바람을 맞은 벽, 녹슨 철문, 생선을 말리던 자리, 그물코에 엉겨 붙은 해초 같은 것들이 바다를 붙잡고 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도 바다는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다시 물가로 내려가 걷다가 조개껍데기 하나를 집어 든다. 언제 속살을 내주었는지 알 수 없는 빈집이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니 등에 가느다란 금이 여러 겹 그어져 있다.


그때 박경희 시인의 「조개」 첫 구절이 떠올랐다.


나무에만 나이테가 있는 줄 알았다. 나무는 한자리에서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견디며 몸 안에 시간을 새긴다. 조개는 다르다. 물이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자리에서 모래와 파도에 몸을 맡기며 등에 시간을 새긴다.


바다의 나이테는 어디에 있을까. 방파제 콘크리트의 금일 수도 있고, 바닷바람에 녹슨 철문일 수도 있다. 새벽바다로 나가는 배의 선체에 덧칠된 페인트일 수도 있다. 평생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의 눈가에 깊어진 주름일 수도 있다. 골목과 항구와 사람에게도 조개껍데기 같은 금이 하나씩 생긴다.


파도가 한 번 지나가면 금 하나.

겨울이 한 번 지나가면 금 하나.

배 한 척이 돌아오지 못한 해에도 금 하나.

제 몸 어딘가에 지나간 바다를 새기고 있다.


조개는 조금만 건드려도 몸을 닫는다. 

살아 있다는 것이 꼭 세상을 향해 몸을 활짝 여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재빨리 닫는 것도 생의 방식이다. 파도가 밀려올 때 몸을 닫고, 위험한 기척이 닿으면 더 단단히 입을 다문다. 속살이 보드라울수록 껍데기는 단단해야 한다.


시인은 조개가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 까닭을 “끝내 흩어 버릴 파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물무렵의 감포 바닷가 풍경

그 말 앞에서 다시 바다를 본다.

파도는 끊임없이 와서 무엇인가를 만지고 부수고 데려간다. 방금 발밑에 있던 물거품도 사라지고 모래 위에 쓰인 글씨도 지워진다. 바다는 제 앞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개는 입을 다물었는지도 모른다.


단단한 껍데기 안에 보드라운 몸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조개는 오래전부터 여성성의 상징으로 읽혀왔다. 그러나 박경희의 시에서 조개를 곧바로 여성의 은유로 읽어버리면 정작 조개라는 생명 자체가 지닌 힘을 놓치게 된다.


조개는 파도 속에서 제 몸을 지키고 모래 속으로 파고들며 자기 시간을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이다. 그 생명을 오래 바라보고 난 뒤에야 앙다문 입에서 어떤 여자의 침묵을 보고, 껍데기의 주름에서 늙어가는 사람의 얼굴을 발견한다.


박경희 시인의 조개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닫힘’의 힘이다. 닫힌다는 것은 세상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라 제 안의 보드라운 것을 지키는 일이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그 안에서 나이테 하나를 더 만든다. 


조개는 단단한 껍데기 안에 보드라운 몸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조개는 오래전부터 여성성의 상징으로 읽혀왔다.

조개 야담·1 — 홍합


김선태


홍합은 많이 먹으면 예뻐진다 하여 예로부터 중국에선 동해부인(東海夫人)이라 불러왔지요. 삶을 때 우러나는 뽀얗고 시원한 국물과 담백하고도 쫄깃한 육질은 그만이지요. 게다가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드러나는 발그레한 명기(名器)와 예봉(銳峯)에 털까지 수북하게 돋아 있으니 뭇 사내들이 군침을 흘릴 수밖에요. 이따금씩 단골 술집엘 가면 속살을 말려 안주로 내놓기도 하는데, 세상에나 이만큼한 고급 술안주가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청상과부 같은 이 조개를 날것으로 먹기란 쉽지 않지요. 강제로 칼로 쪼개거나 깨뜨리지 않는 이상 죽어도 몸을 열지 않습니다. 열을 받아야만 순순히 벌어지지요. 그래서 뭔가를 제대로 먹으려면 굽거나 삶는 거 아니겠어요?


홍합을 ‘동해부인’이라 부른 이야기에서 시작해 홍합의 모양과 속살을 여성의 육체에 겹쳐놓는다. 김선태의 「조개 야담·1 — 홍합」은 조개의 입을 엉뚱한 쪽에서 벌려놓는다.


홍합을 ‘동해부인(東海夫人)’이라 부른 이야기에서 시작해 홍합의 모양과 속살을 여성의 육체에 겹쳐놓는다. ‘명기’와 ‘예봉’ 같은 노골적인 말까지 끌어들여 고전적 은유와 민속적 입담을 동시에 소환한다. 홍합의 생김새와 조리 과정이 음식과 성적 상징이 뒤섞인 한바탕 야담이 된다. 조개가 갑자기 점잖은 상징에서 내려와 술상에 앉은 것이다.


박경희 시인의 조개는 건드리면 입을 닫는데 김선태 시인의 홍합은 열을 받아야 입을 연다. 박경희가 닫힘과 나이듦에서 생의 내밀함을 읽는다면, 김선태는 익살과 풍속의 언어로 조개를 육체와 욕망의 자리까지 끌어낸다. 같은 조개인데 사람의 눈을 통과하자 전혀 다른 생물이 된다.


바닷가 횟집이나 시장 앞을 지날 때도 그렇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렸을 때는 하나의 생명이었던 것이 좌판에 놓이는 순간 먹을 것이 되고 값이 된다. 몇 마리에 얼마, 한 바구니에 얼마. 바다는 금세 숫자로 바뀐다.


관광객에게 바다는 사진 한 장의 풍경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매일 나가야 하는 일터다. 새벽에 배를 띄우고 그물을 걷고, 잡아온 것을 늘어놓고 값을 매기고, 생선을 다듬고 말려 자식들을 먹이고 학교에 보냈을 것이다.


바다가 아름답다는 말은 그래서 육지 사람의 말인지도 모른다. 바닷가에서 평생을 산 사람에게 바다는 밥이고 품삯이고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풍랑이었고 빈 배였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했을 것이다.


홍합의 생김새와 조리 과정이 음식과 성적 상징이 뒤섞인 한바탕 야담이 된다. 

바닷가 사람들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면 조개껍데기가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람이 긁고 소금기가 스미고 햇볕이 말린 흔적. 매끈하지 않은 그 금들이 얼마나 오래 바다 곁에서 살아왔는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조개의 나이테를 따라가다 보면 뜻밖에도 돈을 만난다. 고대 중국에서는 조개껍데기가 교환의 매개이자 부의 척도로 사용되었다. 뒤에는 조개 모양을 본뜬 청동 화폐까지 등장했다. 그 오래된 기억은 문자 속에도 남았다.


재물 재(財), 재화 화(貨), 귀할 귀(貴), 살 매(買), 품팔이 임(賃), 무역할 무(貿), 재물 자(資).


돈과 재물, 거래를 뜻하는 여러 글자 안에 조개 패(貝)가 들어 있다.


바닷속에서 제 몸 하나 지키려고 입을 꼭 다물고 살던 것이 육지로 올라와 재산이 되었다. 사람들은 조개의 속살을 먹고, 껍데기로 물건을 사고팔았다. 속살을 잃은 뒤에 오히려 값이 생긴 셈이다.


자연산 개오지조개 껍데기 화패

오른쪽 뼈를 갈아 만든 골패. 왼쪽 중국 동전의 기원이 된 구리로 만든 조개 껍데기 동패.

시장을 지나 다시 바닷가로 나온다. 배 한 척이 방파제 쪽으로 천천히 들어온다. 물 위에서 배가 한 번 기울 때마다 햇빛도 함께 기울어진다. 갈매기 몇 마리가 뒤를 따라오고, 바다에 떨어진 빛들이 비늘처럼 뒤집힌다.


손바닥에는 아까 주운 조개껍데기가 아직 있다. 손을 펴본다. 내 손금과 조개껍데기의 금이 잠시 겹친다. 어느 쪽이 더 오래 살아온 무늬인지 알 수 없다. 내 손에는 지나온 날들이 있고 조개의 등에는 지나온 바다가 있다.


사람은 해를 세어 나이를 먹고, 조개는 파도를 세어 나이를 먹는 것일까. 


파도가 밀려온다. 조금 전까지 발밑에 드러나 있던 젖은 모래가 물속으로 사라진다. 조개는 다시 입을 다문다. 


어쩌면 조개가 등에 붙이고 다니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파도가 지나간 횟수인지도 모른다.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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