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강화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치원 교사로 일하다 서부 호주 퍼스에서 유학 중이던 남편과 1991년에 결혼, 호주로 이주했다. 세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지냈고, 2005년 퍼스에서 시드니로 이사했다. 2008년 수필창작교실을 수료한 후 글쓰기를 시작해, 2010년 『문학시대』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2015년 제46회 한민족통일문예제전에서 입상했다. 현재 한글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지나 수필가
마거릿 리버에서의 첫날밤처럼
깊은 밤, 잠에서 깼다. 갱년기 탓일까. 요즘 들어 수면 장애로 고생이다. 오늘 밤도 이렇게 밤을 새울 것 같다. 눈을 감아도, 떠도 온통 어둠뿐이다. 빛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창가에 시선이 멈춘다. 블라인드를 살짝 걷고 창밖을 내다본다. 짙은 어둠 속, 눈썹처럼 가느다란 달이 외로이 떠 있다. 그 곁에 달을 위로하듯 별 하나가 유난히 반짝인다. 오래전, 마음이 지치고 힘겨웠던 때,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마음으로 맞이했던 그 새벽이 떠오른다.
유학생 남편을 따라 서부 호주 퍼스Perth에 정착하면서 시작된 신혼은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외아들인 남편과 아이를 무척 좋아하던 나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 아기를 기다리며 병원을 수없이 오갔다. 3년 만에 찾아온 첫 아이, 그리고 연년생 둘째가 태어났다. 간절히 원했던 만큼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 쏟았다. 하지만 다시 3년 뒤, 셋째가 태어나고는 어떤 정신으로 살았는지 모를 만큼 힘겨운 날들이었다.
물론 남편이 도와주긴 했지만, 육아는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큰아이가 유치원에 갈 때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내려주는 일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저마다 다른 것을 원했고, 나는 그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애썼다. 어느새 몸은 한계에 다다르고, 체중은 결혼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사랑으로 시작된 여정이었지만, 지친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그 사랑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그즈음, 지인이 여행을 제안했다. 세 가정이 함께 2박 3일 남쪽으로 떠나자고 했다. 우리 아이들을 포함해 남자아이들만 다섯 명. 과연 이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을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기에 기꺼이 동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목적지는 마거릿 리버Margaret River. 이름이 예쁜 이유도 결정에 한몫했다.
“빨리빨리 준비해!”
이른 아침, 설렘 가득 안은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여름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날, 서서히 도심을 벗어나 달리는 차창 밖 멀리 인도양이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초록빛 바다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부드럽게 일렁였다. 집을 떠나 그 풍광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뜨거운 바람조차 상쾌하게 느껴졌고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바셀턴Busselton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바다 내음이 코끝에 매달려 함께 달렸다.
바셀턴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간단히 먹고, 쉴 새도 없이 바셀턴 제티(jetty, 방파제)로 향했다. 남반구에서 가장 길다는 목재 방파제다. 1.8km에 이르는 그 길은 바다 위로 곧게 뻗어 있었다. 아이들은 다리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중간쯤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비릿한 바다향이 진하게 퍼졌다. 방파제 양옆으로 투명하게 펼쳐진 바닷속에는 물고기 떼가 유유히 지나가고, 해초는 바람에 흩날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감상할 틈을 주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서둘러 다시 차에 올랐다.
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왼쪽에는 빽빽한 숲과 나무들이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오른쪽에는 인도양의 푸른 물결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신나게 달리는 그 길 위에서만큼은 육아의 고단함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얄링업 비치Yallingup Beach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파도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서퍼들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물결을 따라 움직이듯 유려한 몸짓은 한 편의 춤사위 같았다. 경이로웠다. 아이들도 넋을 놓은 채 한참을 그 광경에 빠져들었다. 눈앞엔 하얀 모래사장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졌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름난 와이너리들이 드넓은 대지 위에 평온하게 자리했고, 그 너머 초원에는 양과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자연의 숨결에 나도 섞여 함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잔잔한 위로가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내가 사는 도시와는 확연히 달라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몇십 분 후, 숙소에 도착했다. 숲인지 산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곳에 덩그러니 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사이 해는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우선 짐을 옮겨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집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커다란 트램펄린(Trampoline) 하나가 전부였다. 아이들은 그 위에서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어둠이 완전히 내리기 전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잔뜩 준비해 온 바비큐였다. 우리만 있는 고요한 공간에서 풍성하고 근사한 저녁 파티가 열렸다. 주변은 여전히 어슴푸레 밝았다. 벌레들의 노랫소리는 점점 또렷해졌고, 아이들은 모기에게 물렸다고 아우성을 쳤다. 결국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차를 마시던 여자들이 이대로 잠을 자기엔 너무 아쉽다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환호성이 터졌다. 하늘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가까웠고 손을 뻗으면 잡힐듯한 별들이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았다. 별천지였다. 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과 돗자리를 깔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감탄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북두칠성을 찾아보려 했지만 하늘을 촘촘히 채운 별 속에서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아이들을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고도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데 불쑥 내 젊은 날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살았던 시골에서 한여름 밤이면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별을 세곤 했다. 북두칠성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로의 별에 얽힌 추억을 나누던 중,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비는 것이란 말을 하는 찰나 눈앞에서 별똥별이 휙 하고 지나갔다. 소원을 빌 새도 없이 너무도 빠르게. 여기저기서 별똥별들이 밤하늘을 가르며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은 무척이나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순간, 잊고 지냈던 오래된 감정이 되살아났고,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작은 소망 하나가 조심스레 노크를 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작고 소중한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사실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순간들인지, 그 모든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동안 아이들을 핑계로 미뤄두기만 했던 내 꿈도 살며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몇 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별들은 여전히 등불처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많은 별 중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내 머리 바로 위에서 선명하게 반짝였다. 마치 내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아무리 긴 어둠이라도 끝내 반드시 아침이 온다고, 그러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위로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그 밤의 울림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잔상으로 남았다.
어느새 어둠 속에서 빛나던 별은 사라지고 희뿌옇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은 또 오겠지. 그리고 저 달은 좀 더 커져 있겠지. 마거릿 리버에서의 첫날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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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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