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깨우자
오늘날 시는 더 이상 낭독되지 않는다. 문학이 말해진다면 영화화된 작품이고, 예술은 ‘예술의 경영’과 등치되며, 문화는 ‘콘텐츠’없이 생각하기 어렵다. 휴대폰, 클릭, 블로그, 댓글…. 이것은 필요하다. 무엇보다 현실적 변화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지배적으로 된다면, 그것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목록은 점차 늘어나고 있고, 속도도 더 빨라지고 있다.
수년 전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 Bourdieu)는 작가 귄터 그라스(G. Grass)와의 대담에서 유럽의 계몽정신은 오늘날 좌초한 듯 사라져버렸다고, 그래서 몽매주의에 빠진 이 나라(프랑스)에서 참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편하다고 말한 적 있다. 그는 에른스트 융거 같은 극우 작가에게 프랑스 대통령이 훈장을 수여하는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지만, 이것은 일반적 관점에서 봐도 타당해 보인다. 비판적 이성정신의 쇠퇴는 유럽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현실에서도 해당되고, 우리에겐 그런 전통이 부재했기에, 그 폐해는 더 심각해 보인다.
보수적 혁명의 거대한 물결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면, 이 물결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이 시대정신은 최대수익을 겨냥하면서 기존의 세계관 전체를 뒤엎고 있다. 시장의 힘은 이제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적 정신적 문화적 분야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이윤과 효용을, 그것도 즉각적으로 내보이지 않는다면, 이젠 아무 것도 고려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를 말하고 예술과 문화를 언급하는 것은 한참 뒤떨어져 보인다.
빌려온 관념 앞에서, 그리고 이 관념의 언어 앞에서 논리를 존중하기보다는 감성에 휩쓸리며, 투명한 절차보다는 일탈과 비약을 선호하는 이 땅에서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공론장이 형성되기에는 아직 멀었고, 시민성이 체화되기엔 여전히 이른 시각. 사람들은 명함과 이력을 다투어 내보이고, 사회는 실적과 성과를 어디서나 요구한다. 이것은 역으로 믿을 수 있는 언어가 그만큼 적고, 신뢰할 수 있는 태도가 드물어서일 것이다. 많은 것이 거짓 위로가 되고, 적잖은 언어가 사실을 떠난 이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적어 보인다. ‘자본주의의 광기에 대항하는 운동’…. 이런 말이 허황되게 느껴진다. 그보다 작은 일, 더 생생한 것은 무엇일까? 이럴 때면 중얼거리던 시 한 구절이 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敵)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아픈 몸이’(1961) 중에서
김수영(金洙暎)은 이 시를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겪은 다음 썼다. 역사의 좌절과 이 좌절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는, 시작해야 하는 어떤 다짐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것이 아니더라도 여러 관점에서 또 오늘의 시점에서도 이 작품은 읽힐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폭력성은 온존하고, 세계의 불합리는 지속되는 까닭이다.
삶의 적은 현실에도 있고 내 안에도 있다. 국내에 있듯이 국외에도 있다. 도처에서 나는 적을 만난다. 무수한 적들을 한 사람의 적으로 나는 만나는 것이다. 그렇듯이 이들은 예술의 밖에도 있고 학교 안에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이 편재한 적의 박멸이 아니다. 적은 그렇게 쉽게 소멸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스럽지도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이미 이 적에 감염되어 있는 까닭이다. 단순한 대립은 또다른 상처를 낳을 수 있다. 그렇다고 수긍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관점에서 다시 검토되고, 더 나은 삶 안으로 포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열린 감각으로 느끼고자 한다. 그리고 이 느낌을 사고의 변화에 연결시키고자 한다. 이때 택한 방식은 예술적·철학적·인문적 대응이다. 인문학은 마라톤이다. 그것은 경험의 운용이 아니라 그 성찰이라는 점에서 간접적이고, 효용이라기보다는 이 효용의 효용성을 묻는다는 점에서 반성적이다. 그리고 이 반성은 다시 경험의 조직에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문운동은 이처럼 여러 우회로를 지나간다. 그 점에서 비효율적이고 무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도처에서, 점점이, 물이 스미듯, 천천히 스며들며 작동한다. 그래서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무담보 소액신용대출(micro credit)처럼 예술의 방식은 작고 미세하지만 강력한 대응방법이다. 그것은 감각과 경험의 바닥에서 일어나는 미시적 반성활동(micro-reflection)이다.
사람이 사람과 이어져 있듯, 한 무리는 다른 무리에, 사회는 또 다른 사회에, 국가는 또 다른 국가에 얽혀 있다. 하나의 정체성은, 그것이 사회적이든 국가적이든, 고착될 때 추상화된다. 경직된 정체성은 현실이 아니라 허구다. 우리의 삶은 자신의 성격과 인성 그리고 성향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살아간다는 것의 참 의미다.
변화의 잠재력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나는 내가 아니고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자신을 달리 형성시키고자 하고, 그렇게 형성시킬 준비를 갖추는 것은 이 점에서 정치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의 시민화’는 그 다음에야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적들과 함께, 적의 적들과 더불어, 무한한 연습을 하며, 우리 같이 가자.
최용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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