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의 문학

1930년대 궁핍했던 식민지 현실 위로해준 소냐·카추샤
이른바 저항과 투쟁의 1980년대엔 고리키의 ‘어머니’ 열풍
우리의 시대는 무엇을 읽는가, 문학은 오늘도 유효한가
시대가 읽는 문학이 있다. 20세기 초 한국을 휩쓴 러시아 문학 붐은 일본에서 건너왔지만, ‘남의 얘기 같지 않다’는 동질감은 제국보다 식민지 현실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봉건 전제 사회의 부조리와 억압받는 민중의 아픔을 반영한 그 문학은 위대한 휴머니즘의 보고(寶庫)였으며, 짓밟힌 삶에 대한 연민과 저항 의식을 여느 서구 문학보다 잘 대변해주었다.
톨스토이의 카추샤가 유린당한 처녀들의 대명사고, 도스토옙스키의 소냐는 희생당한 ‘순이’들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셈이다.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니코프는 물질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식민지 청년의 분신인 듯했다. 투르게네프의 손 흰 잉여 인간은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픈(정지용 ‘카페 프란스’) 식민지 지식인과 겹쳐졌고, 체호프가 그려낸 ‘환멸기’ 러시아의 애수는 근대 조선의 슬픔으로 투영되었다.
힘없는 시대였다. ‘20만 경성 인구에 걸식자가 18만’이라던 궁핍한 시대는 러시아 민중의 빈궁에 공감하며 세상을 저주하는, 일종의 룸펜 프롤레타리아적 니힐리즘에 빠져들었다. 그런 절망의 시대 앞에서 인간의 힘과 존엄성을 역설해준 작가가 막심 고리키(1868-1936)다.
혹시 80년대 운동권 필독서였던 소설 ‘어머니’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머릿수건 동여맨 어머니와 그 품에 안긴 아들 그림의 노란색 책 표지가 떠오를 것이다. 1905년경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평범한 농촌 여인이 혁명에 뛰어든 노동자 아들의 뜻을 이어 붉은 전사가 되는 내용이다. 불의에 맞선 투쟁의 대의와 각종 전술 전략이 총망라된 이 혁명 서사가 민주화 시기에는 운동 교본 겸 역할 대본으로 읽혔다. 희생된 ‘열사’ 아들을 뒤따르는 어머니들은 ‘한국판 고리키 어머니’에 비유되었다. 문학적으로는 결코 성공한 작품이 아니고, 작가 자신도 실패작으로 인정한 바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는 그런 문학이 필요했다.
그보다 반세기 앞선 1930년대는 고리키 초기 작품 ‘첼카시’와 ‘밑바닥에서’를 읽으며 열광했다. 거칠고 무지막지한 밑바닥 삶 속에서도 최후의 자존감을 잃지 않는 민중 이야기다. 첼카시는 집도 절도 없는 항구 부랑자인데, 비록 도둑질은 할지언정 인간 속성의 저속함과 위선에 무릎 꿇지 않는다. 탐욕에 사로잡힌 비굴한 청년 얼굴에 침 뱉으며 돈다발을 집어 던지는 마지막 장면은 영웅적이기조차 하다. 빈민굴을 배경으로 한 희곡 ‘밑바닥에서’에는 사기꾼 도박사의 격언적 대사가 나온다. “인-간! 당당하게 들리는 말 아닌가! 인-간! 인간을 존중해야 해! 동정으로 멸시하지 말고, 존중해야 해!”
고리키의 대문자형 ‘인간’은 울거나 한탄하거나 애걸하지 않는다. 절망과 추악의 나락에서도 고개 숙이는 법 없이 “앞으로! 높이! 좀 더 앞으로! 좀 더 높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힘없는 시대의 독자들은 이 당당함에서 불굴의 용기와 위안을 얻었다. 고리키의 당당한 인간형은 막연히 상상된 형상이 아니라, 무학에 가까운 농촌 출신 부랑자 알렉세이 페시코프(고리키의 본명)가 실제로 삶의 ‘최대 고통’(필명 ‘막심 고리키’의 의미) 끝에 이루어낸 자기 완성의 증거였다. 실증의 역사가 힘없는 시대에 희망을 주었다.
고리키 자전 소설 3부작 중 ‘어린 시절’을 보면, 허구한 날 맞고 때리는 일투성이다. 혁명 전 러시아 민중의 현실이 그러했고, 어린 주인공도 외할아버지에게 많이 맞았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이어서 어머니마저 잃게 된 아홉 살짜리 꼬마에게 할아버지가 말한다. “넌 메달이 아니다. 그러니 내 목에 매달려 있지 말고 사람들에게 가거라.” 집에서 쫓겨난 고리키는 길 위에서 스스로 성장했다. 책과 세상을 통해 배우며 민중을 대표하는 작가로 살아남았다.
이병주 역사소설 ‘지리산’의 중학생 주인공은 고리키를 읽는다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갔다 나온 후 일본인 교장 앞에서 고리키에 대한 존경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가난하게 자라, 고생하면서 혼자 공부해 가지고 그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데 감동했습니다. ... 어려운 환경을 이겨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이것이 1930년대의 시대색이다.
20세기 두 시대가 고리키를 읽었다. 크게는 같은 방향으로, 그러나 서로 다른 각도에서. 궁금해진다. 21세기는 고리키를 어떻게 읽을까? 힘 잃어 지쳐버린 것도 같고, 힘에 냉소적인 것도 같은 시대다. 과연 오늘의 시대가 읽는 문학은 무엇일까? 오늘의 시대에도 문학은 유효한가와 관련된 질문이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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