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칼럼] 시작이라는 인간의 본능 -청암 배성근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1-22 09:04


[인문칼럼]시작이라는 인간의 본능



‘시작’이라는 말은 가볍게 쓰이지만, 그 말의 뿌리는 놀랍도록 깊다. 한자 *시(始)*는 女·⼛·口의 결합이다. 어머니의 몸에서 흘러나온 젖을 아이가 입으로 빨아당기는 모습이다. 삶의 첫 장면은 스스로 선택한 결단이 아니라, 살기 위한 본능의 움직임이었다. 젖을 빠는 행위는 단순한 섭취가 아니라, 생을 향해 힘껏 끌어당기는 최초의 의지다. 시작이란 그렇게 내 안에 힘을 저장하려는 원초적 본능에서 비롯된다.


반면 *초(初)*는 衣와 刀로 이루어져 있다. 옷을 만든다는 것은 곧 자르는 일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좋은 천이라도 가위질과 칼질을 거치지 않으면 옷이 될 수 없다. 초(初)는 태어남의 시작이 아니라, 결단의 시작이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잘라낼 것인지, 방향을 정하는 행위다. 여기에는 망설임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이 두 글자를 나란히 놓고 보면, 시작은 언제나 두 방향에서 온다. 하나는 주어진 생의 시작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선택하는 삶의 시작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을 선택하지 못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새로 재단하며 살아갈 수는 있다. 간난아이처럼 다시 입으로 힘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옷감을 앞에 두고 칼을 벼리듯 삶의 방향을 가다듬기도 한다.


그래서 시작은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행위다. 어떤 날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버텨야 하는 시작이고, 어떤 날은 과감히 잘라내야 가능한 시작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출발선에 섰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절반의 결단을 끝냈다는 뜻일 것이다.


세상의 시작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이후의 방향과 마무리는 온전히 각자의 몫이다. 시작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일수록 끝이 흐릿해지고, 시작을 깊이 성찰하는 사람일수록 삶의 마무리는 단단해진다. 오늘의 시작이 내일의 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자의 오래된 지혜 속에서 다시 배운다.


시작은 새로움이 아니라, 본능과 결단이 만나는 자리다. 그리고 인생은 그 자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다시 통과하는 여정이다.


청암 배성근 시와늪문인협회 회장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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