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정치》 갈등극복론의 반(反)정치학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등록 2026-02-04 22:58


갈등극복론의 반(反)정치학





정치인 가운데 ‘극복’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다. 민주정치에서 대부분의 갈등 사안은 싸워서 물리치고 넘어서겠다는 군사주의적 열정을 앞세워 해결하기 어렵다. 노사 갈등, 세대 갈등, 계층 갈등 극복을 말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런 갈등은 극복될 수도 사라질 수도 없다.


민주정치는 그런 갈등 때문에 존재하며, 그런 갈등이 극복될 수 있다면 더불어 민주정치의 역할도 사라질 것이다. 사회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사회 속에서 해결되기 어려운 그런 갈등을, ‘공공정책적 대안을 둘러싼 갈등’으로 전환해 ‘내전과 해체의 길’이 아닌 ‘조정과 타협의 길’로 안내하는 것이 민주정치다. 그렇기에 큰 갈등일수록 정치의 역할을 통해 완화되고 개선될 일로 이해되어야지, 극복을 외치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극복론’이 정치를 지배한다는 것은, 갈등적 사안에 대한 실체적 접근이 약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해당사자는 물론 정당들 사이의 이견과 차이, 대립 속에서 방법을 찾아가려는 ‘어려운 길’ 대신 사회 여론 앞에서 갈등 극복자 내지 해결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과시하는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여론은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며, 그보다는 작위적 힘과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여론에 호소하고 여론을 동원하는 정치가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그에 반대하는 여론의 동원이 이어지고 매체와 지식인들이 경쟁적으로 확성기 역할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가 더 양극화되고 분열되는 악순환을 지금 우리는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갈등극복론’이 ‘여론동원 정치’의 다른 짝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런 정치 담론은 의도했든 아니든 사회 갈등을 있어서는 안 될 ‘비정상’ 내지 ‘불합리한 예외 상태’로 정의하게 된다. 당연히 그런 상황에 종지부를 찍는 ‘특단의 조치’를 앞세우는 담론이 따라오고, 이를 말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계몽 군주’처럼 착각하는 행태를 보일 때도 많다.



선거제도 개혁을 말하면서 ‘평등하고 비례적인 참여와 대표의 원리’를 말하면 충분할 일을, “망국적 지역주의, 그대로 둘 수 없지 않습니까? 극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담론을 앞세우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글쎄, 지역주의가 뭐길래? 선거제도만 바뀌면 극복된다는 지역주의는 또 뭐지?


1990년대 중반 이전에는 지역감정이나 지역차별 같은 용어가 사용되었을 뿐 지역주의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역을 둘러싼 갈등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지역 ‘주의’라는 말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혹자는 호남의 투표행태를 비난하기 위해 지역주의가 심하다고 말하고, 혹자는 문제의 지역주의는 영남패권주의라며 이 말을 쓰고, 혹자는 충청의 지역주의도 문제라며 마치 한국사회 모두가 지역주의에 빠져 있는 듯 말했다. 나라 망하게 생겼다는 개탄의 의미 이상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수 없는 이 ‘망국적 지역주의론’ 대신, 차이를 객관화하고 현실적인 개선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지역격차, 지역차별, 지역편견 같은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고 그에 맞게 실태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부터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그런 문제의식은 보기 어렵다. 지역주의는 나쁘기만 해야지 더 따져서는 안 되는 것일까? 어쩌면 막연히 지역주의 극복을 외치는 사람일수록 지역주의자일 가능성이 높은 게 우리 현실이다.


갈등이란 말을 없앤다고 갈등이 사라지지 않듯, 극복될 수 없는 갈등을 극복하자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그럴 경우 갈등의 실재가 어떤지를 자세히 조사하고 이를 해결할 구체적 실마리를 찾으려는 긴 노력이 들어설 공간만 없어진다.


정치란 ‘갈등의 정의’를 둘러싼 ‘갈등의 체계’라 할 수 있다. 더 실체적으로 갈등에 접근해 더 나은 공공정책적 대안을 만든 정치집단이 승리해야 민주주의다. 자신의 정당 안에 있는 다양한 인적 자원과 정책적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조직해 팀으로서 일하는 사람이 정치가이며, 이 기초 위에서 홍보와 메시지 기능이 발휘되어야 정치와 여론도 그 내용이 풍부해진다. 여론의 주목을 받으려는 사적 욕구만 두드러지면 정치도 정당도 조직도 정책도 팀도 모두 공허해진다. 정치의 조직적 역할이 약해진 사회는 분열을 피할 수 없다. 오늘의 우리 현실만큼 이를 실증하는 사례도 없다고 하겠는데, 부디 정치를 정치답게 하는 정치인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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