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칼럼]석장승, 달빛 아래 서 있는 약속-청암 배성근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3-03 15:59

사진 제공@지리산  동방선도총본사 지리산천궁 법안 이지영 법사


정월 대보름의 달은 한 해의 첫원만(圓滿)을 상징한다. 둥근 달빛이 마을을 고루 비추는 밤, 사람들은 어김없이 마을 어귀로 모인다. 그곳에는 오래전부터 한자리를 지켜 온 석장승이 서 있다. 돌로 깎아 세운 형상이지만, 그 앞에 서면 우리는 단순한 조형물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잊게 된다. 그것은 공동체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약속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석장승 기원제는 나라의 태평성대와 마을의 안전, 풍요를 비는 전통 의식이다. 그러나 그 깊은 의미는 기복을 넘어선다.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소망보다 마을의 안녕을 입에 올린다. 개인의 욕망을 잠시 접고 공동의 평안을 기원하는 순간, 의례는 공동체 윤리의 장이 된다. 달빛 아래에서 나누는 기도는 곧 함께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다.


고로쇠나무와 감나무에 새끼줄을 연결하는 상징적 행위는 고진감래의 질서를 드러낸다. 쓴 시간을 지나야 단맛에 이른다는 삶의 통찰, 고통을 건너야 풍요가 찾아온다는 경험의 지혜가 그 안에 담겨 있다. 나무와 나무를 잇는 매듭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매듭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하나의 끈으로 연결될 때, 공동체는 비로소 하나의 몸이 된다.


정월 대보름 의식에 스며 있는 오행의 사유 또한 주목할 만하다. 목·화·토·금·수의 질서는 자연의 순환을 설명하는 동시에 인간 삶의 균형을 일깨운다. 금기는 억압이 아니라 조율이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긋는 행위는 공동체가 스스로를 지키는 지혜였다. 절제와 경계가 있었기에 마을은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석장승은 토(土)의 기운을 품은 존재다. 광물질이 응축된 돌은 세월의 압력을 견디며 서 있다. 사람의 생애가 덧없게 느껴질 만큼 긴 시간을 통과해 온 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유한함을 자각한다. 돌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무엇을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가.


우리 조상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 여겼다. 그것은 우월의 선언이 아니라 책임의 인식이었다. 하늘의 질서를 본받아 땅 위에서 조화를 이루라는 뜻이다. 석장승은 그 책임을 환기시키는 상징이다. 흩어지기 쉬운 마음을 모으고, 분열되기 쉬운 관계를 다잡는 화합의 구심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빠른 변화 속에서 살아간다. 공동체적 의례는 점차 간소화되고, 개인의 삶은 점점 더 고립된다. 그러나 달빛 아래 모여서는 시간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돌 앞에서의 침묵은 곧 연대의 언어가 된다.


달은 다시 차오르고 다시 기운다. 풍요와 결핍 또한 그렇게 순환한다. 그 반복 속에서 석장승은 변함없이 서 있다. 달빛 아래 서 있는 그 돌은 말없이 우리에게 약속을 요구한다. 함께 살겠다는 약속, 서로를 지키겠다는 약속, 자연과 조화를 이루겠다는 약속. 정월 대보름의 밤, 그 약속은 돌보다 단단해진다. 그리고 그 약속이 있는 한, 공동체는 여전히 살아 있다.



시와늪문인협회 대표 배성근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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