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하얀 먼지 폴폴 날리던 시골버스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언어유희 통해 웃음 자아내는 감동과 여운

해피 버스데이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
행복한 버스가
힘차게 떠났다
─ 오탁번 시집 『우리 동네』
모국어도 외국어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기 마련인가 보다. 오해라기보다 유머와 위트가 있어서 절로 웃음이 난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한글과 한자를 잘도 섞어 써먹었으니 뛰어난 기지와 재주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생면부지의 할머니와 외국인도 같이 탄 행복한 버스가 되어 달리듯 우리도 웃으면서 힘차게 달려보자. 유년시절 하얀 먼지 폴폴 날리던 시골버스가 눈앞에 선하다.(이상개 시인)

먼지 풀풀 이는 시골버스 정류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버스는 늘 느릿하고, 사람들은 그 느림마저 받아들이며 기다리곤 했다. 오탁번 시인의 「해피 버스데이」는 그 기다림 속에서 생겨나는 언어의 오해를 따뜻한 유머로 바꿔 놓는다.
"왔데이"가 "먼데이"로, 다시 "버스데이"로 이어지며 생겨난 웃음은, 사실 그 옛날 시골버스의 정겨움과 닮아 있다. 서툰 말들이 얽혀도 서로의 마음을 열면 그 순간이 곧 노래가 되고 축제가 된다. 흙길을 달리던 낡은 버스처럼, 우리 삶도 삐걱거리면서도 결국엔 웃음을 싣고 힘차게 달려간다.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오탁번 시인은 언어유희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독특한 시인이다. 시인의 해학은 단순한 해학에 멈추지 않고 웃음 뒤에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위의 시는 항간에 전해지는 음담패설을 차용해 시로 옮긴 것인데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가 갖는 언어유희가 서로 다른 의미를 발생시키면서 웃음을 유발시킨다.
남편과 아내, 굴비장수의 육성을 그대로 살려내 대화 중에 인물들이 간간히 사용하는 사투리는 시적 배경과 잘 어우러져 더욱 정감이 묻어난다. 오탁번 시인은 이야기 중에 시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시인의 시적 능력임을 강조한다.
그는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를 시적으로 승화시키는 심미안이 뛰어나다. 위의 시 역시 항간에 떠도는 재담을 시로 창작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우스갯소리를 시로 잘 승화했다. 가난이라는 것과 굴비의 맛을 해학으로 잘 그린 시지만, 웃음으로 시작해 끝 부분에 이르러 울컥해지는 감정을 어찌할 수 없다.
또 익살스럽고 멋있는 농담 속에는 사랑과 슬픔과 삶이 녹아있다. 그의 詩는 재미있고 뭔가 가슴을 치는 말이 들어 있기에 더 큰 감동의 울림을 주는 것이 아닐까.
말의 비틀림 속에서 오히려 깨달음을 주는 독특한 시를 써온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낸 지천(芝川) 오탁번 시인이 2023년 12월15일 별세했다.
오탁번 시인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고려대 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1년에는 당시 금기시된 정지용 시인을 연구한 석사 논문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철이와 아버지」가 당선되었고, 그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당선되었다. 1969년에는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의 땅」이 당선되기도 해 신춘문예 3관왕으로 화려하게 문단에 나섰다.
동서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고산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오탁번 시전집』, 『손님』, 『우리 동네』, 『시집보내다』, 『알요강』,『속삭임』(유고 시집)이 있다. 또 소설전집 『오탁번 소설』 1~6, 학술서 『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 평론집 『현대문학산고』, 『헛똑똑이의 시 읽기』, 『현대시의 이해』, 산문집 『시인과 개똥참외』, 『오탁번 시화』, 『두루마리』 등 다양한 장르에서 끊임없는 창작 활동을 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국어과 교관, 수도여자사범대 국어과 조교수를 거쳐 1978년부터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2008년까지 30년간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이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교수로 지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하였고, 1993∼1994년에는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1998년 시 전문 계간지《시안(詩眼)》을 창간하여 발행함으로써 한국시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2008~2010년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다. 2010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하였으며, 202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다.
오탁번의 시인의 마지막 시집『비백飛白』
비백 飛白
오탁번
콩을 심으며 논길 가는
노인의 머리 위로
백로 두어 마리
하늘 자락 시치며 날아간다
깐깐오월
모내는 날
일손 놓은 노인의 발걸음
호젓하다
이 시는 오탁번의 시인의 마지막 시집 『비백飛白』의 표제시로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 한 편의 짧은 풍경시이면서 동시에 동양 미학의 한 원리를 시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시의 장면은 단순하다. 논길을 따라 콩을 심으며 가는 노인이 있고, 그 머리 위로 백로 두어 마리가 하늘 자락을 스치며 날아간다. 모내기철인 깐깐오월, 일손을 잠시 놓은 노인의 발걸음은 “호젓하다”고 끝맺는다. 시 속에는 특별한 사건도, 격한 감정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고요한 순간 속에서 삶의 깊은 여백이 드러난다.
이 시의 제목인 ‘비백(飛白)’은 서예 용어에서 온 말이다. 비백은 후한 시대 서예가 채옹이 창안했다고 전해지는 서체로, 붓을 빠르게 움직일 때 먹이 완전히 스며들지 않아 획 속에 흰 부분이 드러나는 기법을 말한다. 먹과 먹 사이, 획과 획 사이에 생기는 흰 틈이 바로 비백이다. 이 흰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움직임과 생동감을 드러내는 중요한 미적 요소다. 획이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바람과 속도, 여유와 리듬이 느껴진다.
이러한 서예적 개념은 시 속의 장면과 절묘하게 대응한다. 노인이 콩을 심으며 가는 느린 걸음은 하나의 먹획이라면, 하늘을 가르는 백로의 날갯짓은 그 획 사이로 스치는 흰 여백과 같다. 삶의 노동과 자연의 움직임이 교차하면서 시는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논길의 고요함과 하늘을 가르는 새의 움직임 사이에서 생기는 공간, 바로 그 틈이 이 시의 ‘비백’이다.
또한 시의 마지막 행에 등장하는 “호젓하다”라는 표현은 비백의 미학을 삶의 태도로 확장한다. 모내는 바쁜 계절 한가운데서도 노인은 잠시 일손을 놓고 길을 걷는다. 그 느린 걸음은 쉼과 여백을 허락하는 삶의 리듬을 상징한다. 서예에서 획을 채우지 않고 남겨두는 여백이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처럼, 인생 역시 모든 시간을 채우기보다 비워둘 때 조화가 생긴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 시는 우리 삶에 필요한 ‘비백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현대인의 일상은 빼곡한 먹빛처럼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그러나 모든 획을 꽉 채우면 글씨가 숨을 쉬지 못하듯, 삶도 여백이 없으면 숨이 막힌다. 노자가 말한 허정(虛靜)의 세계, 즉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는 상태가 바로 비백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결국 「비백」은 단순한 농촌 풍경을 넘어, 삶의 여백과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다. 논길의 노인과 하늘의 백로가 만들어내는 한순간의 풍경은, 먹과 여백이 어우러진 서예 한 획처럼 우리 마음속에 조용한 울림을 남긴다. 이 시를 읽는 순간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 일손을 놓고 하늘을 바라볼 여유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시가 우리에게 건네는 ‘비백’의 선물일 것이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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