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네 번째 ‘산아래서 詩누리기’ 수목원 산책에서
낮은 음역이지만 그윽하고 힘 센 실존의 언어
시인의 사표가 될 만한 시혼을 가진 ‘시만 쓰는 바보’
박상봉 시인 네 번째 시집『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출판기념 산아래서 詩 누리기
마흔 네 번째 북토크가 산아래 詩 수목원산책에서 열렸다. (사진=공수권 제공)
지난 13일 오후 5시 박상봉 시인 네 번째 시집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 출판 기념으로 산아래서 詩 누리기 마흔 네 번째 북토크가 산아래 詩 수목원산책(대표 이아침)에서 열렸다.
이복희 시인 사회로 열린 이날 북토크는 심강우 시인이 대담자로 박상봉 시인과 함께 나란히 앉아 북토크를 진행했다. 이어 장옥관 전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시인)와 김용락 전 한국국제교류문화진흥원 원장(시인)의 축하 멘트와 시낭송, 관객 질의응답 등이 어우러지며 약 90분 동안 열렸다.
서정희 시인이 ‘무밭’을 낭독하고, 이아침 시인이 ‘시인의 말’, 모현숙 시인 낭독 ‘풍각 오일장’ 이난희 시인이 ‘붓꽃’, 이복희 시인이 ‘저녁의 점자’ 를 낭독했다. 객석에는 김완준 모악출판사 대표(소설가), 오승건, 윤창도, 손준호, 권춘옥, 박언숙, 서하, 차회분, 박금선, 곽미숙, 백지은 시인을 비롯해 계명대 시민교육원 시창작 세미나 원이문·근이문 회원 및 이애란 시인, 동네 주민 등 40여 명의 관객이 자리를 메웠다.
박상봉 시인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1981년 『시문학』 추천에 이어, 박기영ㆍ안도현ㆍ장정일 등과 동인지 『국시』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일찍이 1980년대 중반 대구 봉산동에서 북카페 ‘시인다방’을 만들었고 ‘시인과 독자의 만남’,‘산아래서 詩 누리기’ 등 200회 이상 북토크를 기획·진행하면서 시와 공간, 시와 사람을 잇는 문화기획자로 오래 활동해왔다. 시집으로 『카페 물땡땡』 『불탄 나무의 속삭임』 『물속에 두고 온 귀』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를 펴냈으며, 세 번째 시집 『물속에 두고 온 귀』 로 제34회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이날 낭독된 시는 다음과 같다.
서정희 시인이 ‘무밭’을 낭독하고 있다.(사진=공수권 제공)
무밭
박상봉
무밭에 쪼그려 앉아 있다 보면, 등줄기 땀이 줄줄 흐르는데 내 마음 뿌리도 조금씩 드러난다. 무청 툭툭 털면 흙이 박혀 거칠고 갈라진 손에서 물 냄새 땅의 냄새 섞여났다. 뭇국을 끓이면 냄새는 냄비 속에서 다시 피어났다. 소금간도 하지 않고 끓인 국이었지만, 뭇국에는 늘 엄마 손의 짠맛이 배어 있다. 내가 앓던 밤에도 엄마는 무를 썰었다. 차가운 무 강판에 갈아 약처럼 먹이던 손길, 입 안이 얼얼했지만 묘하게 속은 편안했다. 무라는 것이 꼭 사람 같다고 느낀 건 그때부터. 상처가 나도 그냥 두면 다시 자라났고, 뿌리째 뽑혀도 국물이 되어 누군가의 속을 데워주었다. 살아 있다는 건 뽑히고 썰리고 끓여지고 먹히는 것. 무를 다 뽑은 자리에 다시 무를 심고, 그 자리에 엄마의 기척을 남겨두었다. 무를 썰던 손, 뭇국 냄새, 그리고 뜸 들인 말들. 근심을 뽑아먹고, 뿌리 내린 슬픔을
해장하듯 씻어내는 일. 엄마는 무였다
이아침 시인이 ‘시인의 말’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공수권 제공)
시인의 말
박상봉
잡풀 우거진 문장을 밟고 구두(口頭)를 신고 걷다 보면 종이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입속의 흙길을 걷는 일 같다. 말마다 뿌리가 있고, 그 뿌리에 엉겨 붙은 흙이 있다. 문장 하나하나 밟으면서 혀를 흙 묻은 신발처럼 털어내야 한다. 문장은 늘 정리되지 않은 길이다. 아직도 지나가고 있는 발자국의 현재진행형. 구두가 돌을 밟을 때마다 부서진 말들이 튄다. 때로는 말이 너무 무거워 발이 빠진다. 진창 같은 문장 속에서 문법이 미끄러지고, 의미는 발목을 잡는다. 신발을 벗고, 맨입으로 걸어야 했다. 입말은 늘 흙냄새가 났다. 구두의 밑창이 닳듯, 입천장도 닳아간다. 반복된 말이 남긴 마모의 흔적이 내 시의 표면이다. 어떤 날은 문장이 길을 거부한다. 종이가 스스로 허리를 접고, 단어들이 행간을 밀어낸다. 구두는 점점 해지고, 혀는 더 단단해진다. 소리의 그림자를 밟으며, 귀 없는 언덕을 올라갈 때 잡풀 속에서 단어 하나가 피어난다. 조용히 신발을 벗는다. 발과 입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그제야 문장은 다시 길이 된다. 풀잎이 발끝을 간질이고, 내 안의 바람이 말을 잇는다. 걷는다는 것은 결국, 말의 세계를 지나 몸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모현숙 시인이 ‘풍각 오일장’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공수권 제공)
풍각 오일장
박상봉
파장 무렵 외로움 한 되 팔았다
손목 붙잡고 금세 따라갈 듯한데
쓸쓸은 뼛속까지 스며든 광물처럼 쉽게
뿌리 캐낼 수 없는 물질이라
오래된 눈물만 무겁게 쌓아놓는다
이별은 흩날리는 장터의 먼지처럼 흔해
아무도 흥정해오지 않는다
책도 제법 팔았지만, 책장은 텅 비어도
머릿속에 남은 문장들은
내 안에서 오히려 더 단단히 뿌리 내린다
나는 종종 그 문장들 속에서 길을 잃고
빈손으로 돌아온다
봄은 어디서나 쉽게 팔리는 빛깔이라
꽃잎 몇 장만 얹어도 모두 기꺼이 사 간다
그러나 겨울은 팔기 힘든 물건이다
추위와 눈발은 누구도 소유하려 들지 않기 때문
오일마다 찾아오는 풍각 장날
흔들리는 좌판 앞에 앉으면
무엇을 내어놓고 어떻게 흥정할지
어디까지 버릴지 망설인다
오늘은 팔리지 않은 추위만 싸 들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내일은 또 다른 계절을 장마당에 펼칠 것이다
이난희 시인이 ‘붓꽃’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공수권 제공)
붓꽃
박상봉
붓꽃은 대지가 쥔 붓
바람이 지나가면 획이 그어지고
햇빛이 스며들면 잉크가 번진다
강가에 늘어선 붓꽃 군락은
거대한 원고지의 푸른 줄
보랏빛 꽃잎은 쉼표나 마침표다
떨어진 꽃잎은 여백이 되고
씨앗은 또 다른 문장의 서두가 된다
시인은 붓꽃 앞에서 읽는 자일 뿐
파도는 행서, 나뭇잎은 초서,
붓꽃은 정갈한 해서체다
적벽을 묵묵히 필사한다
너른 대지에 먼저 써둔 문장을
겨우 흉내 낼 뿐이라도
한 자루 필생의 붓으로 베껴 쓴 시
압화押花처럼 어느 책갈피에서
되살아날 것을 믿는다
그것을 간절이라 부르련다
간절곶 아래 붓꽃 한 송이 파랗다
파도 닮아 파랗다
이복희 시인이 ‘저녁의 점자’를 낭독하고 있다.(사진=공수권)
저녁의 점자
박상봉
저녁의 뒷잔등에 기대어 지는 해를 바라본다
무거운 하루가 걸쳐둔 겉옷 닮은 노을이
창틀 위에 주름을 남긴다
저녁의 무게가 말을 눌러 앉히는 시간
아직 피지 않은 국화 몇 송이
채 끝나지 않은 계절이 고개 숙이고
바람의 뒤뜰에 혼자 남아 기다리는 저녁은
편지보다 오래 걸리고
사라진 것들을 불러내는 저녁의 방식은
언제나 너무 조용해
그리움이 문열고 들어온 뒤
손끝으로 문장을 읽는 대신
눈빛으로 말 걸면
저녁이 저물어도
나는 여전히 어제의 뒷잔등 아래서
너를 조금씩 늦게 사랑하고 있다
박상봉 시인이 독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사진=공수권 제공)
이하석 시인은 시집 발문에서 “세 번째 시집 『물속에 두고 온 귀』 에 이르러 그의 시가 엄청난 변화를 보여주면서 자신만의 확실한 세계를 피워 보인다”고 평가하였다. 엄원태 시인은 그의 시를 “낮은 음역이지만 그윽하고 힘이 센 실존의 언어”로 읽어낸다. 이런 평가는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가 감각적 실험을 넘어, 삶의 본성에 닿아 있는 시집임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시집은 언어와 묵음, 소리와 침묵의 경계에서 시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집요하게 탐색한다.
마지막으로 장옥관 시인은 조선 정조시대 귀감이 되는 열정과 뜨거운 투혼을 가진 실학자 이덕무에 빗대 “박상봉 시인은 우리 시인들의 어떤 사표가 될 만한 시혼을 갖고 계신 분이다”라면서 “이덕무를 ‘책만 보는 바보’라고 했는데 시인 박상봉은 ‘시(詩)만 쓰는 바보’”라고 덕담을 해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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