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평화의 가교

1988년 서울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었다. 당시 소련, 동독,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이 모두 참가하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개혁·개방 정책과 맞물려 냉전 해체의 서막을 알렸다. 올림픽이 '만남의 장'이자 사상 교류의 장이 되면서 동서 진영 간 새로운 질서가 움트기 시작했다. 문화와 스포츠가 정치적 경계를 허무는 힘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문화의 파동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 세계를 흔들고 있다. 바로 '한류'다. 영화·게임·예능 등 콘텐츠 전반이 아시아를 넘어 미주와 유럽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에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같은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으며, 한류의 저력이 얼마나 거대한지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일본·미국 자본의 힘을 빌려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거꾸로 보면 자국 문화가 타국에 의해 전파될 때 그 파급력은 더욱 크다. 자기 자랑보다 남의 칭찬이 더 돋보이는 법이다.
이제 한류는 단순한 대중문화의 유행을 넘어 새로운 시대의 '프랜차이즈'로 진화하고 있다. 로열티는 곧 무형의 자산, 국가 위상으로 귀결된다. 어느 TV 드라마 '폭군의 셰프'는 시간을 넘나드는 사랑 이야기로,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인간애의 숭고함을 그린다. 악마적 권력조차 사랑 앞에 무너진다는 메시지는 국경과 세대를 초월해 울림을 준다. 한류 콘텐츠가 서양 고전문학과 나란히 비교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그 영향력이 문화의 보편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류의 저력은 음악·드라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정명훈의 라스칼라 음악감독 취임, 박천휴의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이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다. K팝 가수들이 빌보드 차트를 장악하는 현상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플랫폼이 한국 작품을 앞다퉈 편성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한국 문화가 특정 지역의 취향을 넘어 세계 보편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산울림 멤버 김창완은 뉴욕 공연 후 "한류의 일번지는 한글"이라고 강조했다. 서예가 강병인은 전통 서예와 현대적 감각을 결합해 한글의 세계화를 이끌고 있다. 국악인들이 오페라 무대에 오르고,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회'가 출범한 것도 의미 있다. 다만 '대중문화'라는 명칭만으로는 한류의 품격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한국 문화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기구와 이름이 필요하다. 국악·한글·전통예술까지 포괄할 수 있는 보다 격조 있는 명칭이 바람직하다.
오늘날 한류는 단순한 문화 전파를 넘어선다. 그것은 남북 평화를 향한 '소프트 론칭'이 될 수 있다. 정치적 대화가 막힐 때에도 문화는 스며든다. 우리가 지향하는 남북 화해와 공존의 길에서 한류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문화가 평화를 열고, 평화가 문화를 키우는 선순환. 한류는 이미 그 길목에 서 있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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