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책을 떠나보내고 난 빈 책장 앞에 서면,
파도가 물러간 자리처럼 고요하지만,
다음 페이지는 다른 독자의 밤 속에서 넘겨지고 있다.

바다책, 다시 채석강
문인수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인데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冊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문인수의 시 「바다책, 다시 채석강」을 읽을 때마다 책은 종이의 묶음이 아니라 끝없이 넘겨지는 파도라는 생각이 든다.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어 잠들지 못하던 시인의 밤처럼, 책을 떠나보내는 마음도 좀처럼 잠들지 않는다. 페이지를 넘겨도 끝나지 않는 바다처럼, 책을 정리해도 기억은 계속 밀려온다.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는 구절은, 어쩌면 책을 다 읽지 못해서가 아니라 끝내 닿을 수 없는 어떤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책 속에는 늘 아직 읽지 못한 시간이 남아 있다. 책을 버린다고 해서 그 시간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안동 놉실로의 시집도서관 포엠으로 책을 보내던 날, 묶어 둔 시집들이 마치 먼 항구로 떠나는 배처럼 보였다. 오래 꽂혀 있던 책등의 먼지가 희미한 물결처럼 일어나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오래된 밤의 소리가 따라 나왔다. 책은 가만히 있었지만 나는 자꾸 밀려났다.
문인수의 시에서 “아 너라는 冊”이라고 부르던 대상은 한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시대일 수도 있고, 한 권의 책일 수도 있다. 시집을 포장하면서 문득 생각했다. 내가 보내는 것은 책이 아니라 나의 어떤 시절이 아닐까. 밑줄 그어진 페이지마다 지나간 계절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시집은 읽히기 위해 존재하지만 때로는 머물렀던 자리 자체로 한 권의 기록이 된다. 오래 함께 있던 책들을 상자에 담는 순간, 책은 더 이상 소유물이 아니라 여행자가 된다. 한 사람의 서가에서 다른 사람의 서가로 이동하면서 문장은 다시 살아난다.
안동시 남선면 놉실로 146 번지에 위치한 ‘시집도서관 포엠’
시집도서관 포엠은 그런 이동의 정거장이다. 도시의 빠른 시간 속에서는 밀려났던 문장들이 그곳에서는 다시 천천히 호흡한다. 조용한 시골마을의 공기 속에서 시는 다시 파도가 된다.
문인수의 시에서 파도는 넘겨도 끝나지 않는 페이지였다. 놉실로로 떠난 시집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시 펼쳐질 때, 그 책은 또 다른 밤의 바다를 만들 것이다.
책을 보내는 일은 정리라기보다 번역에 가깝다. 한 사람의 기억 속에 있던 문장이 다른 사람의 시간 속으로 옮겨지는 일. 책은 말없이 이동하지만 그 이동은 늘 마음을 흔든다.
어쩌면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에게 읽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책은 오래 곁에 머물며 한 사람의 삶을 조용히 수정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책은 떠나며 다른 삶을 다시 수정한다.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책을 떠나보내고 난 빈 책장 앞에 서면, 그 문장이 오래 남는다. 파도가 물러간 자리처럼 고요하지만, 다음 페이지는 이미 다른 독자의 밤 속에서 넘겨지고 있을 것이다.
6년 전 ‘코로나19’로 인한 ‘자가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 등으로 한창 힘든 때 이야기다. 바깥으로 나가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고 나홀로 집안에서 ‘자가격리’ 상태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책 읽고, 글 쓰는 데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책 정리도 했다. 책장에 꽂아둔 책 외에도 창고에 쌓아둔 책, 이사할 때 그대로 박스에 넣어둔 책, 버릴 책이 왜 이리 많은지? 이방저방 좁은 공간을 이리저리 다니며 책 정리를 하다보니 허리가 쑤시고 어깨가 아파 신신파스 한장 붙이고 또 다시 신나게 움직였다.
사두기만 하고 읽지않은 새책들도 꽤 많았다. 이번 기회에 웬만한 책들은 모조리 솎아내었다. 오래된 책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쓸만한 책들 중에서 시집은 따로 챙겨 안동 놉실로 마을에 새로 생긴 ‘시집도서관’으로 보냈다.
전에는 책 정리할 때 시집은 두고 소설책이나 산문집을 주로 버렸는데, 나랑 인연이 깊은 저자들의 사인을 받은 것까지 아낌없이 처분하였다.

나랑 인연이 깊은 저자들의 사인을 받은 것까지 아낌없이 처분하였다.
우리집 책장을 장식하던 시집들이 우체국 꽃가마 타고 안동의 시집도서관으로 시집을 갔다.
시집 외에 산문집과 평론집, 여행서적을 비롯해 작곡을 전공한 아내가 독일 음악도서관 가서 구해온 명곡 CD음반들과 영화CD도 함께 포장했다.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든 음반들도 있어 아끼며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다. 가수 혜은이를 직접 만나 사인 받은 음반도 꽃가마에 태워 보냈다.
오랜 세월 나와 지낸 시간들을 뒤로 하고 양반마을에 시집 가서 어여쁜 꽃들과 어울려 잘 지내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든 음반들도 가수 혜은이를 직접 만나 사인 받은 음반도 꽃가마에 태워 보냈다.
안동시 남선면 놉실로 146 번지에 위치한 ‘시집도서관 포엠’은 피재현 시인이 사재(私財)를 털어 만든 문화공간이다. 강호의 숱한 소인묵객들의 관심과 도움의 손길도 줄을 잇고 있다. 멀리 제주도에서 20만원 상당의 신간 시집을 사서 택배로 보내온 열렬 독자도 있고, 평생 모은 문예잡지 창간호를 몽땅 기증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나도 예전에 대구 시내에서 ‘시인다방’이라는 북카페를 운영한 바 있어 ‘시집도서관’과 같은 문화공간을 여는 일이 얼마나 큰 어려움이 따르는 모험인지 잘 안다.
도심지도 아니고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여간한 결단 없이는 마음 먹기조차도 쉽지가 않다. 틀림없이 그는 오랜 궁리 끝에 사심을 버리고 세상을 위한 선(善)한 일을 하고자 용단을 내렸을 터이다.
몇 해 전 아내의 성화로 집안에 책들을 과감하게 솎아내 중고서점 ‘알라딘’에 끌고가서 팔고, 고물상에 폐지로 넘기고 그래도 아직 쓸만한 책들을 한짐 넘게 안동 ‘시집도서관 포엠’으로 떠나보냈다.
책이 떠나는 길은 언제나 사람보다 느리다. 사람은 주소를 바꾸지만 책은 시간을 바꾼다. 안동 남선면 놉실로 146번지, 지도 위에서는 점 하나에 불과하지만, 시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은하에 가깝다.
도시는 책을 소비하지만 시골은 책을 보존한다. 속도를 잃은 장소만이 문장을 오래 붙잡는다. 놉실로의 공기는 문장 사이 여백처럼 넓고, 낮은 담장은 시의 행갈이처럼 조용하다. 시집도서관 포엠은 건물이라기보다 질문에 가깝다.
누가 아직 시를 읽는가, 왜 아직 시를 모으는가.
그 질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시가 된다.
놉실로의 저녁이 오면 책들은 서로의 등을 기대고 잠든다.
그 침묵 속에서 가장 오래 깨어 있는 것은 사람일 것이다.
시는 늘 늦게 도착하지만 책은 가장 오래 머문다.
시집 도서관 포엠 내부 전경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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