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 불신과 보상 문제 결합 시 갈등 가장 격화"…에너지경제연구원 보고서
"절차 신뢰 회복 없이 물질적 보상만 투입되면 공동체 내부로 갈등 전가"
'345kV(킬로볼트) 신계룡∼북천안 송전선로 건설사업'에 반대하는 충청권 주민들이 지난 4월 7일 세종청사 기후에너지환경부 정문에서 집회를 열고 사업의 전면 백지화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이재영 기자 = 송전망 건설 등 '에너지 전환'에 필요한 사업을 두고 발생하는 갈등을 증폭하는 핵심 요인은 돈보다는 '절차에 대한 불신'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보상 문제는 단독으로 갈등을 증폭하기보다는 절차에 대한 불신과 결합해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탈(脫)석탄 등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갈등을 최소화하려면 무엇보다 이해관계자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의미다.
14일 최근 에너지경제연구원이 내놓은 '에너지 전환 갈등 쟁점 유형화 연구' 보고서를 보면 연구진이 검토한 에너지 전환 관련 갈등 사례에서 갈등을 증폭한 공통된 요인은 '절차적 신뢰'와 '보상·배분'이었다.
연구진은 국내외 사례 8건을 분석했다.
여기에는 한국의 경남 밀양시 송전망 건설과 관련한 갈등, 미국에서 오바마-트럼프-바이든-트럼프 행정부를 거치며 에너지 정책이 180도 바뀌면서 발생한 갈등, 프랑스에서 가르단 화력발전소를 바이오매스 발전소로 전환하면서 발생한 갈등, 작년 스페인에서 발생한 이베리아 대정전 관련 갈등 등이 포함됐다.
밀양 송전망 갈등은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3·4호기에서 생산된 전력을 북경남변전소로 수송하는 765kV(킬로볼트) 송전선로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이다.
연구진은 "공익과 주민 생활권의 충돌, 절차적 정당성, 대안의 실현 가능성, 공권력과 인권, 보상과 공동체라는 5개 쟁점이 연쇄 결합한 복합 공공 갈등이었다"고 진단했다.
연구진은 밀양 송전망 갈등은 전력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사회적 가치와 송전선로 경과지 주민의 생활·건강·재산권이라는 다른 사회적 가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가운데 '절차와 신뢰', '공권력과 인권', '보상과 공동체'라는 다른 쟁점이 결합하며 증폭했다고 봤다.
송전망 건설에 따른 건강 피해와 생활환경·재산·경관 훼손 우려에서 시작해 절차의 정당성과 대안의 실현 가능성 논쟁을 거쳐 공사를 재개한 뒤 현장 질서를 유지하려는 공권력과 이에 따른 인권침해 문제로 확대된 뒤 보상 때문에 한국전력과 주민 간 갈등이 주민 내 갈등으로 갈등이 '연쇄·확장'했다는 것이 연구진 설명이다.
연구진은 밀양 송전망 갈등을 증폭한 요인으로 우선 '공식 협의체가 여러 차례 운영됐지만 이 절차가 실질적인 숙의로 이어지지 않은 점'을 꼽았다.
2013년 정부와 한전은 갈등조정위원회 23차례, 대화위원회 18차례, 전문가 협의체 등 여러 공식 채널로 협의를 시도했다고 했으나 2019년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사업 정보 제공과 의견 수렴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밀양 송전망 갈등을 증폭한 두 번째 요인으로 '보상·분배와 공동체 내부 효과'를 제시했다. 밀양 송전망 갈등으로 송전설비주변법이 제정되며 '보상과 지원의 제도화'가 이뤄졌지만, 보상과 분배 과정에서 공동체가 분열했다고 연구진은 지적했다.
연구진은 "보상과 지원은 갈등을 완화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내 균열을 심화할 수 있다"면서 "에너지 인프라 관련 갈등에서 물질적 보상만으로는 신뢰와 공동체 손상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에너지 고속도로 논의도 이런 다층적 쟁점 구조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면 밀양 송전망 갈등과 유사한 갈등이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연구진은 밀양 송전망 갈등을 포함해 8개 사례 중 6개 사례에서 절차에 대한 신뢰 문제가 갈등을 증폭하는 요인이었다고 밝혔다. 보상과 분배 문제도 밀양 송전망 갈등 등 6개 사례에서 갈등 증폭 요인이었다고 했다.
연구진은 "주목할 점은 보상과 분배 문제가 단독으로 갈등을 증폭하기보다는 절차적 신뢰 문제와 결합했을 때 갈등을 가장 심하게 격화했다"면서 "밀양 송전망 갈등에서 보이듯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보상과 합의 과정이 공동체 분열로 이어지며 다른 갈등을 낳는 것은, 절차적 신뢰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물질적 보상이 투입되면 갈등이 '사업자 대 주민'에서 '주민 대 주민'으로 전가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에너지 전환은 화석연료 중심 체계에서 저(低)탄소 체계로 에너지 생산·저장·운송·소비 방식을 바꾸는 정도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산업구조·고용·토지이용·지역경제·거버넌스 등 사회 전반에 구조적 변동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에너지 전환 관련 갈등은 복합적이고 연쇄적이며 전환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경시된 가치는 쉽게 소멸되지 않는다. 이에 한 가치관과 프레임만 앞세워 갈등에 대응하면 갈등이 더 복합적으로 증폭될 수 있는데, 프랑스에서 '기후정합성'을 내세워 탄소세 부과를 추진하자 형평성·조세정의·대표성을 내세운 노란 조끼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한 것이 대표 사례다.
연구진은 ▲ 에너지 전환 단계별 차별화된 갈등 완화 수단 ▲ 갈등 쟁점 사전 진단 ▲ 전환 과정에서 다양한 가치 포괄 ▲ 이해당사자 실질적 참여 ▲ 선행적으로 절차적 정당성 확보 ▲ 갈등 조기 관리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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