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여전히 진행형”…김종희 작가 『아버지는 위대한 문장이다』 북토크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8-30 22:23

‘한 집안의 기억은 한 시대의 기록’…김종희 작가 대구불로동에서 독자들과 만나

토문재에서 보낸 시간·교도소 글쓰기·시니어 문화공간 운영 등 삶과 문학 이야기 나눠

독자들의 호응 커 출간 열흘만에 2쇄, 서둘러 3쇄 돌입

산문집『아버지는 위대한 문장이다』를 들고 대구 독자들과 만난 김종희 작가부산에서 활동하는 김종희 작가가 산문집 『아버지는 위대한 문장이다』를 들고 대구 독자들과 만났다.


시집전문 책방 산아래 詩가 마련하는 ‘산아래서 詩 누리기’ 58번째 행사가 지난 29일 오후 4시 대구 동구 ‘산아래 詩 블로엔’에서 열렸다.


이날 김 작가는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기억, 집성촌에서 성장하며 형성된 문학적 감수성, 해남 토문재에서의 경험, 교도소와 정신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활동, 시니어 문화공간 운영 등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대담은 박상봉 시인이 맡았으며 배재경 시인과 독자들이 함께 책의 주요 대목을 낭독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김 작가는 『아버지는 위대한 문장이다』를 쓰게 된 출발점에 대해 “한 집안에 한 명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에 대한 기억이 하나의 문화 원형이라고 한다면 한 집안의 기억과 기록은 그 집안만의 사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며 “한 사회를 비춰보고 한 시대를 깊이 들여다보는 창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어쩌면 내가 아버지의 기억과 오빠들의 기억을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일지도 모른다”며 “한 세대가 더 내려가면 이런 기억들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 한 사람쯤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 이야기가 특히 아팠다.

그에게 아버지는 단순히 추억 속의 인물이 아니었다.


김 작가는 “아버지는 여전히 나에게 진행형”이라고 했다.


그는 경남의 집성촌에서 성장했다. 새벽이면 할아버지 형제들이 사랑방에 모여 『열국지』와 『삼국지』, 『초한지』, 각종 열전과 야사를 돌아가며 읽었다.


글자를 깨치기도 전부터 사랑방에 앉아 어른들이 윤독하는 문장을 들었던 경험은 훗날 작가가 되는 중요한 토양이 됐다.


김 작가는 “모르는 세계를 문장으로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그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며 “지금 생각하면 그때 상상력이 만들어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그의 감각적 문장을 만든 사람은 아버지였다.


포도가 익어가는 모습, 꽃이 피는 순간, 아침이 오는 시간, 별이 빛나기 시작하는 때를 아버지가 먼저 보여줬다.


김 작가는 “아버지는 ‘우리 막내가 꽃 피는 걸 먼저 봐야지’, ‘우리 막내가 포도 익는 걸 먼저 봐야지’라고 말씀하셨다”며 “세상을 눈과 감각으로 경험하는 방법을 아버지가 열어주셨다”고 회고했다.


김종희 작가의 산문은 그대로 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문장이 아름답고 시적 이미지가 강하다

박상봉 시인은 이날 “김종희 작가의 산문은 그대로 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미지가 강하다”며 시적인 문장이 만들어진 배경을 물었다.


이에 김 작가는 “모든 인식의 출발은 경험이고, 경험을 표현하면 결국 이미지가 된다”며 “시적인 문장을 일부러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성장했던 문화적·생태적 환경을 감각 그대로 옮겼더니 그것이 이미지가 된 것 같다”고 답했다.


책에서 가장 가슴 아픈 대목 가운데 하나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 이야기였다.


김 작가의 아버지는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점차 기억을 잃기 시작했다. 급기야 딸의 결혼식에서도 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김 작가는 “그때는 내가 살아내기 바빴고 도시에서 김종희라는 주체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더 컸다”며 “아버지 사랑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자신도 자녀를 키우면서 아버지의 언어가 하나씩 되살아났다고 했다.


“우리 막내가 먼저 보면 되지.” “우리 막내가 먼저 하면 되지.” “잘했어.”


김 작가는 “아버지는 나를 다른 아이와 한 번도 비교하지 않았고 강압적으로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며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말들이 두더지처럼 하나씩 올라오고, 석류알처럼 가슴에 박혔다”고 표현했다.


그는 자신도 자녀를 키우면서 아버지의 언어를 따라 살았다고 했다.


김 작가에게 아버지는 ‘물 같은 사람, 풀 같은 사람, 공기 같은 사람’이었다.


중학교 1학년 무렵 처음 생리를 하고 브래지어가 필요했을 때도 아버지가 자전거에 딸을 태워 양장점에 데려갔다. 첫 생리대와 속옷도 아버지가 직접 챙겨줬다.


김 작가는 “아버지는 아버지이면서 엄마였고 언니이기도 했다”며 “내 삶의 문을 열어주고 다독여주고 거름과 물을 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전남 해남 창작공간 토문재에 머물며 집필한 ‘토문재 편지’ 연작을 중심으로 엮은 산문집.

이날 북토크에서는 김 작가가 해남 땅끝 토문재에서 보낸 3주간의 시간도 주요 화제가 됐다.


우리 시대 아버지의 삶과 기억을 따뜻한 시선으로 복원해낸 『아버지는 위대한 문장이다』는 지난해 전남 해남 창작공간 토문재에 머물며 집필한 ‘토문재 편지’ 연작을 중심으로 엮은 산문집이다.


그는 눈에 결막 신생물이 생겨 수술을 받은 뒤 삶의 막막함을 안고 토문재로 향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직 나로서 나를 안고 살아본 적이 있는가.”


그 질문을 품고 땅끝에 도착했다.


토문재 아래 고추밭에서 만난 할머니의 한마디는 작가에게 큰 깨달음을 줬다.


할머니는 익어가는 녹두 꼬투리를 가리키며 “얘들이 이렇게 익어갈 때까지 자기 안에서 얼마나 답답하겠노. 한 놈이라도 답답하다고 먼저 튀어나가면 다 빵이다. 한 무리가 사는 것도 이렇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의식의 한가운데가 갈라지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뒤부터 칸나와 바닷물, 갯벌의 칠게, 물이 빠져나가는 장면까지 모든 것이 말을 걸어왔다.


“사람의 말보다 자연에서 받아써야 할 문장이 더 많았다”는 것이 그의 표현이었다.


아침마다 빗자루로 방을 쓸며 떨어진 머리카락과 각질을 바라보다가 ‘나는 날마다 조금씩 죽고 있구나’라는 생각에도 닿았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발견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 작가는 “살아 있다는 것은 날마다 어제의 나를 잘 보내주면서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며 “토문재에서 보낸 3주는 내 문장을 새롭게 만든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글쓰기는 문학에만 머물지 않았다.


김 작가는 대구교정청 산하 여러 교도소에서 약 6년 동안 수형자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를 진행했다. 정신장애를 겪는 사람들과도 약 7년 동안 글쓰기 활동을 했다.


그는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해도 마음 한구석에는 보드라운 곳이 있다”며 “그곳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창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쟁을 겪은 부산지역 어르신들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도 이어왔다.


그는 “역사의 중심에는 이름난 정치인이나 유명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며 “전쟁 속에서도 자식을 건사하고 가족을 살려낸 평범한 사람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역사의 한 페이지”라고 강조했다.


김 작가는 16년째 문화공간도 운영하고 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던 1950~60년대생 세대에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 출발이었다.


문화·예술·인문공간 빈빈문화원을 운영하며 방송과 공공도서관 등에서 활발한 인문학 강의를 이어오고 있는 김종희 작가는 “놀 판이 있어야 살 판이 생긴다”는 말로 문화공간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북토크 후반부에는 책의 마지막 글인 「오후 4시의 문장」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김 작가는 중년을 ‘오후 4시’에 비유했다.


“오후 3시는 뜨겁고 5시가 되면 저녁이 온다는 생각이 들지만 오후 4시는 한 템포 숨을 고르면서도 아직 무엇인가를 더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어 “중년은 단순히 나이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아직 뜨거우면 중년”이라며 “살아 있는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오후 4시를 걷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삶과 분리된 행위가 아니었다.


김 작가는 “글쓰기는 숨이자 쉼이고, 쉼이자 숨”이라며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내 의식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발가락을 당겨 몸의 감각을 확인하고 ‘내가 살아 있구나’라는 사실을 느낀다고 했다. 그렇게 일상의 순간들을 계속 기록한다.


『아버지는 위대한 문장이다』는 출간 직후 독자들의 호응이 커 출간 열흘만에 2쇄를 찍었으며 3쇄를 앞두고 있다.

김 작가는 “무엇이 되려고 하기보다 내 그림자가 길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의 길어지는 그림자와 뒷모습도 함께 바라보면서 가고 싶다”며 “앞만 보는 기차보다는 때로 옆으로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과 가치를 공유하고 즐겁게 걸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위대한 문장이다』는 출간 직후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빠르게 2쇄를 찍었으며 3쇄를 앞두고 있다.


박상봉 시인은 북토크를 마무리하며 “3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30쇄까지 나아가기를 바란다”며 “지금도 계속 모으고 있다는 ‘아버지의 문장’들이 앞으로 또 어떤 책으로 우리 앞에 올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해 김종희 작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바람을 이렇게 밝혔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도 바라보고 옆 사람의 길어지는 그림자와 뒷모습도 바라보고 싶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기차보다 옆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여러 사람과 가치를 나누며 함께 가고 싶습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가장 위대한 문장을 찾습니다.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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