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코트가 끝나도 인생은 계속된다
US오픈 테니스 코트에서 반가운 얼굴들이 다시 만났다.
한때 세계 테니스를 호령했던 로저 페더러와 앤디 로딕이 단식 이벤트 매치에서 맞붙고, 이어 페더러·존 매켄로 조와 안드레 아가시·로딕 조가 복식으로 코트에 섰다.
승패가 중요한 경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랜 테니스 팬에게는 그 자체가 한 편의 인생 드라마였다.
젊은 날의 페더러와 로딕, 매켄로와 아가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한때 코트 위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단 한 점을 따내기 위해 수없이 자신을 몰아붙였고, 승리의 환희 뒤에는 패배의 쓰라림과 부상의 고통, 기대에 미치지 못한 아쉬움도 감내해야 했다.
환호하는 관중 앞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린 날도 있었지만, 고개를 숙인 채 코트를 빠져나온 날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쌓아 올린 영광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수많은 기록과 우승을 남기고 은퇴했고, 역시 정상의 자리를 뒤로했다. 이미 테니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 이름들이다.
이제 그들의 경기는 치열한 승부라기보다 축제에 가깝다.
그러나 묘한 감동이 있다.
예전처럼 폭발적인 움직임은 아니어도 몸에 밴 기술은 여전히 살아 있고, 한 번씩 나오는 절묘한 샷에는 관중의 탄성이 터진다. 경기 중간중간 보여주는 여유와 재치에는 젊은 시절의 치열함과는 또 다른 멋이 있다.
그래서 웃으면서 바라보다가도 가슴 한쪽이 아릿해진다.
‘저들에게도 저렇게 아름다운 은퇴 후가 있구나.’
그리고 문득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일반인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젊은 날에는 먹고살기 위해 뛰고, 가족을 위해 참고,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애쓴다. 때로는 성공의 기쁨을 맛보지만 실패와 좌절도 겪는다. 그렇게 수십 년을 달리다 어느 순간 현역이라는 이름표를 내려놓는다.
그때부터가 진짜 인생의 후반전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은퇴와 함께 삶의 의미까지 내려놓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더러와 아가시, 매켄로와 로딕의 이벤트 매치를 보면서 생각한다.
현역에서 은퇴했다고 해서 인생이라는 코트까지 떠날 필요는 없다.
젊은 날의 기록과 경쟁은 내려놓되, 자신이 가진 경험과 재능, 유머와 여유는 얼마든지 계속 펼칠 수 있다.

꼭 세계적인 스타가 아니어도 된다.
동네 테니스장에서 라켓을 잡아도 좋고, 공원에서 친구들과 운동을 해도 좋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여행을 하고, 봉사하며, 오랜 친구들과 차 한잔 나누는 것도 훌륭한 인생의 후반전이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젊은 날의 인생이 100점짜리 시험이었다면, 은퇴 후의 인생은 점수를 매길 필요가 없는 자유 경기다.
이제는 남을 이기기 위해 뛰는 것이 아니라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코트에 서는 시간이다.
전설들이 은퇴 후 다시 라켓을 잡는 모습이 아름다운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미 충분히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웃으며 경기하고, 실수하면 웃고, 멋진 샷이 나오면 서로 박수를 보낸다.
젊은 날의 승부욕이 사라진 자리에 여유와 품격이 들어선 것이다.
어쩌면 인생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젊을 때는 죽을힘을 다해 뛰고,
때가 되면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남은 삶은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후배들에게 건네주며,
가끔은 코트에 다시 서서
“아직 나에게도 이런 힘이 남아 있구나” 하고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US오픈의 이벤트 매치는 단순한 번외 경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경기는 끝나도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챔피언의 트로피를 내려놓은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쩌면 가장 뜨거웠던 승부가 끝난 뒤,
조금 느린 걸음으로 코트를 걸어 나오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