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한 편 산문 한편 ⓫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5-09-24 01:24


| 시 | 헌 신발


박상봉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네

살아온 날을 세어보니

기록할 만한 일도 없구나


청춘은 어디로 갔나

내가 세운 공장들은 어디에 있나


밤늦도록 눈 비비며 보던 책들

밑줄 그은 문장의 길 따라

지치도록 구름 위를 달려왔으나


끈이 너덜해진 가방 속

세월을 낭비한 죄의 형량만 무겁네


직장생활 십팔년 아무리 계산해 봐도

한 푼어치 남는 것 없는 밑지는 장사였네


내 집은 어디에 있나

문밖에서 여러 날 지내는 동안

돌아갈 집을 잊어버렸네


내 몸은 어디로 갔나

사람들이 자꾸 낯설어지네


불러낼 친구 하나 없는 저물녘에

발그레 술이 오른 노을과 마주앉아

살아온 날의 뒤안길 돌아보니

뒤축이 닳은 헌 신발만 남았네


ㅡ박상봉 시집『불탄 나무의 속삭임』(곰곰나루, 2021) 56~57쪽

구두 한 켤레. 파리, 1886년 하반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산문 | 헌 신발


낡은 발자국의 껍데기일 뿐인 헌 신발에는 걸어온 시간이 축적돼 있다. 길 위에서 마모된 밑창은 고단한 노동과 서성임의 기록이다. 닳아빠진 흔적이야말로 살아냈다는 증거다.


사람들은 새 신발만 찾지만, 헌 신발이야말로 진짜 몸의 언어를 기억한다. 진창을 밟고 돌길을 건너며 흡수한 먼지와 땀의 무게. 그 속에 묻힌 것은 단순한 흠집이 아니라 살아온 날의 서사다.


‘헌 신발’과 ‘헌신’은 어쩐지 같은 소리를 내며 겹쳐진다. 발을 내어주며 달려온 시간, 몸을 던져 남을 위해 살아낸 일들. 누군가의 헌신은 결국 자기 몸의 마모로 증명된다.


헌신은 화려한 기록에 남지 않는다. 오히려 뒷축이 닳고, 끈이 풀리고, 바닥이 헤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신발처럼 스러져 간다. 그러나 소멸이야말로 가장 뜨겁게 살아낸 증명이다.


신발은 몸의 가장 아래에서 땅을 견디며 버틴다. 사람의 발자취를 대신해 먼 길을 받아내고, 때로는 흙탕물에 젖고, 때로는 눈보라에 갇힌다. 그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감내하는 것이 헌신의 다른 얼굴이다.


버려진 신발을 보면, 버려진 시간이 보인다. 한때는 발을 품어주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불러내지 않는 관계. 그러나 낡아 사라져도, 그 헌신은 발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다.


헌신은 화려한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새벽에 불을 켜고 늦게 불을 끄는 일상,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는 반복, 일터에서 흘린 땀방울. 그것들이 모여 집과 삶을 이루고, 신발의 뒤축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닳아간다.


누군가는 헌신을 희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다른 이의 길을 열어주는 방식이다. 헌 신발이 낡아 떨어져 나가야 새로운 신발이 길을 이어 걷듯, 헌신은 언제나 바통을 넘긴다.


신발이 닳아 사라지는 순간, 헌신은 몸을 벗어나 흔적이 된다. 집 앞에 버려진 신발처럼, 우리 삶도 결국은 낡아버린 헌신의 더미 위에 쌓여간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낭비가 아니라 또 다른 세대가 밟고 일어설 발판이다.


신발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삶을 이끈 여정의 화석이다. 때로는 고무신의 속담처럼 사랑의 변심을 상징하고, 때로는 꿈 해몽 속에서 불길한 징조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상징을 넘어, 신발은 결국 걸어온 발자취의 증거다. 낡아 없어져도, 닳아 떨어져도, 그 흔적은 몸과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나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마음이 무거울 때면 밖으로 나가 걷는다. 비가 와도, 햇살이 따가워도 걷는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길 위에서 내게 말을 건넨다. 그 순간 길은 스승이고 동반자이자 친구가 된다. 풍경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내 책장이 된다.


철학자의 길이 교토와 하이델베르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색하는 발걸음이 곧 철학자의 길이다. 고흐의 신발에서 고뇌와 노동의 흔적을 읽어내듯, 내가 남기게 될 신발 역시 나의 사색의 깊이를 증명할 것이다. 새 신발을 샀으니, 또 걸어야겠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헌 신발이 헌신의 이름으로 남을 때까지.

|박상봉 시인 약력


경북 청도 출신으로 대구에서 성장. 1981년 박기영·안도현·장정일과 함께 동인지 『국시』동인으로 문단활동 시작. 주요 시집 『카페 물땡땡』(2007), 『불탄 나무의 속삭임』(2021), 『물속에 두고 온 귀』(2023) 출간,  근현대 문학·예술 연구서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 공저(2021). 고교시절부터 백일장·현상공모 다수 당선. 1990년 현암사 『오늘의 시』 선정, 제34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북카페·문화공간 ‘시인다방’ 운영, 시·IT융합 문화기획자, 중소기업 성장 컨설팅 전문가.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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