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山大君(월산대군)

조선의 역사를 펼치다 보면, 이름 없이 사라진 권력자보다 이름을 남긴 비권력자들이 더 오래 빛나는 경우가 있다.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
그의 이름은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났으나, 문학의 자리에서 되살아난 사람이다.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는 19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그리고 그 장남, 곧 세조의 손자였던 월산대군은 명백한 왕위 계승자였다. 그러나 운명은 늘 권력의 논리로 쓰인다.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대신들은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왕위를 월산대군이 아닌 의경세자의 동생, 예종에게 돌렸다.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을 때, 왕위는 다시 월산대군에게 향하는 듯했지만 이번에는 성종에게로 돌아갔다. 성종의 장인이자 조선의 권력 실세였던 한명회의 손길이 그 결정의 이면에 있었다.
왕의 자리를 두 번이나 눈앞에서 잃은 청년, 월산대군. 그에게 남은 길은 권력의 복수가 아니라 고요한 내면의 길이었다. 그는 세속의 권좌에서 물러나, 술과 시와 자연 속으로 자신을 숨겼다. 바람과 달을 벗 삼은 그곳, 그는 자신의 정자를 ‘풍월정(風月亭)’이라 불렀다.
풍월정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권력을 버린 한 인간이 자신을 회복하는 은둔의 세계였고, 동시에 시가 권력보다 강하다는 조선 문학의 상징이었다. 그는 자신이 잃은 것을 한탄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잃음 속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가 쓴 488수의 시는 바로 그 자유의 증언이었다.
그의 시에는 조선의 산천과 사계, 그리고 억눌린 슬픔과 초연한 아름다움이 흐른다.
벼슬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 정치의 수사가 아닌 마음의 진정이 있었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권력의 외곽에서 피어난 한 인간의 ‘존엄한 체념’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집은, 놀랍게도 동생 성종의 손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성종은 왕이 된 뒤, 형의 시를 모아 《풍월정집》을 간행했다.
피로 얼룩진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형제애였다. 성종은 정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문학을 통해 형의 영혼을 복원했다.《풍월정집》은 그렇게 왕이 형을 위로한 기록이자, 권력이 문학 앞에 머리 숙인 순간이었다.
월산대군의 생애를 돌아보면, 우리는 역사의 또 다른 정의를 본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인가. 그는 왕이 되지 못했지만, 시대를 초월한 시인이 되었다. 그의 시 속에는 권력의 무게보다 더 큰 하늘이, 조정의 법도보다 더 깊은 인간의 마음이 있다.
그는 왕의 형으로 살았지만, 결국 왕보다 자유로웠다. 그의 풍월정은 단순한 은둔의 공간이 아니라, 권력의 언어를 거부한 예술가의 선언이었다. 그는 풍월을 노래함으로써 세속을 이겼고, 시를 남김으로써 역사를 이겼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경쟁과 권력의 언어 속에 산다. 누가 더 높이, 누가 더 많이, 누가 더 빨리 오르느냐에 세상의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생은 우리에게 묻는다.
“왕이 되는 것보다 더 높은 것은 무엇인가?”
그의 답은 명확하다. 바람과 달, 그리고 시.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했다ㆍ
그는 왕의 옷을 벗고 시인의 옷을 입은 사람이다. 그의 실패는 곧 자유였고, 그의 침묵은 곧 예술이었다.
오늘, 우리는 《풍월정집》 488수의 시를 다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한 왕족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이 권력을 넘어선 자리에서 어떻게 빛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조선의 철학이다.
왕이 되지 못한 시인, 월산대군. 그의 풍월정은 오늘도 바람에 흔들리며 우리에게 속삭인다.
“권력은 잠시지만, 시는 영원하다.”
秋江(추강)
月山大君(월산대군)
秋江夜入水波寒
垂釣無魚不忍還
只載無心明月色
空船撥浪過前灘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실어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시와늪문인협회 대표 배성근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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