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사건은 없다

"판사가 사건 내용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아서 알기 쉽게 준비서면을 써냈어요. 그런데 어제 변론에 가보니 아직도 잘 모르더군요.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이해시킬 수 있을지 대책회의 중입니다." 외국 변호사가 그 나라 판사에 관해 토로한 고민이다.
재판은 판사의 판결로 결론이 난다. 정확한 판결을 위해서는 사건 내용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판사는 사건 현장에 없던 사람이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제출된 증거를 보고 논리적 추론을 하여 사건을 파악한다. 진상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다(원고, 피고, 증인). 그다음으로 변호사가 잘 안다. 그들은 원고(또는 피고)에게 묻고 증거를 수집하여 판사에게 설명한다. 판사, 변호사, 원고, 피고 중에서 진상을 가장 알기 어려운 게 판사다.
하지만 판결은 판사가 쓴다. 판사는 수험생과 같다. 쌍방 변호사의 설명과 그들이 제출한 증거를 공부하여 사건 내용을 파악한다. 그리고 답안(판결)을 쓴다. 만약 오답을 쓴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일차적으로 공부 못한 판사 책임이다. 그다음은 판사의 선생인 변호사 책임이다. 그가 못 가르쳐서 수험생이 오답을 쓴 것이다. 패소한 변호사는 판사가 원망스럽겠지만 그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도 탓해야 한다.
멋진 변론을 위해 준비했는데 판사가 자꾸 질문하는 바람에 변론을 망쳤다면서 속상해하는 변호사도 보았다. 의뢰인 앞에서 멋지게 보이고 싶었는데 아쉬웠단다. 그에게 물었다. 선생의 설명을 질문 없이 듣고만 있는 학생과 자꾸 질문하며 의문을 풀어 나가는 학생 중에서, 누가 더 공부를 잘하겠나요?
판사가 질문하는 것은 진상 파악에 열의가 있기 때문이다. 질문을 들으면 쟁점에 관한 그의 생각도 엿볼 수 있기에 변호사는 이를 바로잡을 기회도 갖게 된다. 질문 많은 판사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법원의 사건은 인생의 한 단면이다.
어느 누구의 인생도 타인과 완전히 같지는 않기에 사건에도 제 각기 다른 점이 있다. 뻔한 인생이 없듯이 뻔한 사건도 없다. 판사는 선입관을 버리고 개방적이고 겸허하게 진상 파악에 나서야 한다. 뻔해 보이는 사건이 가끔 뻔하지 않게 판결이 나는 이유는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진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최용대 발행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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