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는 계절

흔히 연말이면 한 해의 베스트를 선정한다. 올해의 책, 올해의 영화, 올해의 실수, 올해의 사원, 올해의 소비. 한 해가 끝나가는 마당에 '꼽는다'는 행위 자체가 다소 잔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한정된 시간을 알뜰히 쓰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2025 베스트10' 목록을 참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월한 일부를 조명하는 일이 연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낀다.
한 해를 돌아보면 즐겁고 뿌듯한 일 못지않게 힘들고 잘못한 일도 많았다. 그래서 1년을 잘 보낸 사람 말고 그냥저냥 보낸 사람, 후회가 많은 사람, 세상과 자신에게서 어떤 바닥을 본 사람이 자축까지는 아니더라도 온기 섞인 담담함으로 제야의 종소리를 듣길 바라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부의 평가 잣대가 아니라 경험을 스캔해 옥석을 고르고 우열을 가르는 내면의 가혹한 눈부터 감겨야 하겠지만 말이다.
겨울은 돌아보는 계절이다. 친구나 지인과의 만남을 줄이고 인간관계를 거리를 두는 나조차 12월에는 일주일에 약속이 여섯 일곱개씩 잡힌다. 웃고 까불거리고 미래를 도모하는 즐거운 발산의 시간이 지나면, 사방으로 뻗어나가던 에너지와 생각이 내부로 모이면서 차분해진다. 수렴의 시간이 오면 나는 이미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난다. 낮에 만나 커피 한잔했던 사람을 밤에 머릿속으로 다시 불러들여 마주하는 것이다. 돌아보는 일은 장단점이 뚜렷한데 단점부터 말하면 상처를 증폭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조금 삐쳤던 일도 집에 와서 계속 생각하다 보면 치명적인 상처가 되기 십상이다. 돌아보는 일은 모든 순간을 골고루 되새기지 않고 아주 작은 조각만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점 역시 같은 프로세스에서 비롯된다. 만남에서 의미가 있던 순간을 계속 돌아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결국 좋은 기억들이 힘들 때 지지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보험 광고에 나올 법한 빤한 표현이지만 진실이 아닌 건 또 아니니. 셔우드 앤더슨의 단편소설 '종이 뭉치들'에는 주머니에 종잇조각을 계속 쑤셔 넣어 작고 단단한 종이공으로 만드는 인물이 등장한다. 낱낱의 좋은 기억도 단단히 뭉치면 어떤 감정 덩어리가 되는 것 같다. 마음의 주머니 속에 기억으로 뭉친 작은 종이공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얼마 전에 존경하던 선생님의 추모 모임에 다녀왔다. 직속 제자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존경했고 나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분이었다. 고인께서 조문을 받지 않기로 마음을 정하셔서 가까운 분들도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겨우 장례식에 참석하였다고 들었다. 추모 모임은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꾸렸다. 나처럼 직속 제자가 아님에도 선생님을 기억하고 싶은 이도 참석하게 해주어 감사했다. 다른 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때, 그 기억이 나에게도 심기는 기분이었다.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함부로 상상하는 일이 저어되지만, 상상이란 어차피 제어할 수 없고 죄도 아니기에 각자 마음에 지니고 선생님과의 소중한 기억을 조금 전달받아 내 마음에도 심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은 어떤 힘으로 살까.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는 것으로 간신히 위안받지 않을까
최용대 발행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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