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윤정희가 알츠하이머 투병 중 주연한 마지막 작품 ‘시’
윤정희 이전에도 윤정희 이후에도 윤정희 만한 배우가 없다
이창동 감독 윤정희 주연 영화 ‘시’ 포스터.아네스의 노래
이창동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나의 오랜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영화배우 윤정희가 알츠하이머 투병 중 2023년 1월 1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벌써 3주기를 맞았다. 2017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그는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 딸 백진희 씨와 함께 프랑스에 거주해왔다.
1944년 부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조선대 영문학과 재학 중 신인배우 오디션에서 선발돼 1967년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그해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청룡영화제 인기 여우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안개’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1966년 1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신인배우 오디션에 합격, 1967년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윤정희는 뛰어난 미모와 스타성으로 문희, 故 남정임과 함께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 아이콘으로 군림했다.
60~70년대 3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등 국내 유수 영화제에서 무려 7번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안개’(1967) ‘천하장사 임꺽정’(1968) ‘신궁’ (1979) ‘자유부인’(1981) ‘위기의 여자’(1987) ‘만무방’(1994) 등이 있다. 국내를 넘어 몬트리올 국제 영화제, 도빌 국제 영화제, 디나르 국제 영화제, 뭄바이영화제 등의 심사위원과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장(2006)을 거치면서 국내외에서 명실공히 한국 대표 여배우로 인정받았다.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
1994년 개봉한 ‘만무방’은 변장호 감독이 제작하고, 엄종선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1961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오유권 작가의 중편소설 『이역의 산장』을 ‘만무방’이란 제목으로 바꾸어 영화화한 것으로 만무방은 ‘염치나 예의가 없는 뻔뻔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윤정희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초가로 도망 온 두 남자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40대 과부를 연기,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았다. 윤정희는 1973년 돌연 유학을 선언한 뒤 프랑스로 향했다. 3년 뒤 1976년 파리에서 활동하던 백 씨와 결혼해 화제를 불러모았다. 이후 프랑스 파리3대학에서 예술학 석사를 받았다.
1994년 영화 ‘만무방’에 출연한 후 16년 간 연기활동을 중단했다가, 2010년 영화 ‘시’를 통해 스크린에 복귀했다. 이는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윤정희는 사망하기 10여년 전부터 알츠하이머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 시기에는 공교롭게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에서 알츠하이머 환자를 연기한 때이기도 하다. 그해 칸 영화제에 초청됐고,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받는 등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2011년 LA비평가협회와 시네마닐라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도 받았다. 2018년에는 영화평론가상 시상식에 참석해 공로상을 받았다.
영화 ‘시’에서 윤정희는 낡은 아파트에서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미자’ 역을 맡았다. ‘미자’는 윤정희의 본명이기도 하다. 이 작품으로 고인은 제31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윤정희 이전에도 윤정희 이후에도 윤정희 만한 배우가 없다”(서정주 시인).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윤정희 문희 남정임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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