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졌어요. 너무 아파요.
하지만 낫고 싶지 않아요. 계속 아프고 싶어요.’’
누구나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된다
영화 ‘일 포스티노’의 한 장면
일 포스티노
황지우
자전거 밀고 바깥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태동(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 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신촌역(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일 포스티노’는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가 1952년 칠레에서 추방돼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 작은 섬에 기거할 때의 실화를 근거로 만든 이 영화로 우정과 사랑, 인생의 메타포를 섬세하게 그려낸 아주 뛰어난 명작이었다.
시골 마을의 순박한 청년 마리오는 파블로 네루다로부터 시와 ‘메타포’를 알게 되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간다.
특히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해안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서정적 아름다움과 어우러지면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칠레의 유명 시인이자 정치가인 파블로 네루다는 연애시의 대가이자 민중시의 대가다. 사회주의 시인 네루다는 공산주의자라는 것이 빌미가 되어 칠레 정부로부터 수배령을 받아 이탈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로 일자리를 구한 마리오는 말재간도 없고 어딘가 어눌한 청년이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말을 더듬는 습관도 있다. 그런 마리오가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에게 한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게 되고 네루다에게 접근한다. 연애시의 대가로부터 여자를 꼬시기(?) 좋은 시를 배우기 위해서다.
“그대의 미소는 부서지는 은빛 파도이며
순결한 여인과 함께 있는 것은
파도가 부서지는 하얀 백사장에 있는 것과 같다...”
(네루다의 ‘마틸다를 위한 시’에서 )
“당신의 미소는 나비의 날개처럼 얼굴 위에서 펼쳐져요...당신의 미소는 장미, 서슬 퍼런 검, 솟아오르는 물줄기, 그대의 미소는 갑작스런 은빛 파도...”

베아트리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마리오의 입에서 주옥같은 은유가 쏟아져 나오며, 고스란히 한 편의 시가 된다.
시란 설명하면 진부해지고 만다.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감정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 뿐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메타포(은유)’에 대해서, 또한 시의 본질에 대해서 교과서적인 이해를 쉽고 확실하게 전달해 준다.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된다’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사랑과 시는 오누이 같은 존재다. 누구나 사랑을 하게 되면 시를 쓰고 싶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을 하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시는 다른 세상을 은유로 바꾸어 가까이 전달해주는 나비의 날개다. 다양한 세상 이야기를 담은 은유의 편지를 배달하는 우체부가 바로 시인이다.
결국 마리오는 네루다의 시를 익힌 덕분에 베아트리체를 신부로 맞이하는데 성공한다. 결혼식 날 주례를 맡은 네루다는 체포영장이 기각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칠레로 돌아간다.
마리오는 네루다를 만나기 전에는 현실에 안주하고 소극적인 인물이었지만 네루다를 만난 후 적극적이고 깨어있는 민중이 된다. 네루다로부터 배운 ‘메타포’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뜨게 해준 것이다.
‘메타포’는 마리오와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영화 후반에 마리오는 집회에 참여하며 투쟁에 앞장선다.
세상을 알게 되고, 사회를 보게 되며, 깨어있는 사람이 된 마리오는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지만 이 장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정치와 사회적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일 포스티노’는 시와 이탈리아 해안의 배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장면 때문에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영화로 손꼽힌다. 요즘같이 따스한 봄날에 보기 좋은 영화다.
영화 속 네루다의 부인역에는 실제로 네루다의 둘째 부인이 출연하였다.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서 마리오가 ‘네루다를 위한 시’를 읽기 위해 열정적으로 군중을 파헤치고 가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마리오역의 ‘마시모 트로이시’도 영화 촬영 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탈리아 영화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탈리아 국민배우 ‘마시모 트로이시’는 심장병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이 영화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마리오역을 연기했다. 영화는 레퀴엠(진혼곡 鎭魂曲) 같은 네루다의 시가 자막으로 올라가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나를 찾아왔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이었는지
언제 어떻게인지 난 모른다
그건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길에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ㅡ파블로 네루다

시가 내게로 왔다
박상봉
태초에 그것은 은행잎이었을 것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것이 내게로 왔다
어디로 향하는 노란 길일까
누가 시를 내 앞에 융단처럼 포근히 깔아놓은 걸까
태초에 나뭇잎은 숟가락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저를 들었다 놨다 하는 동안
연포탕 기막힌 국물 맛이 목구멍을 넘어가다
한 줄 시가 되어 밥상 위에 뒹구는 저녁이다
오래 기다린 시가 저절로 나를 찾아왔지만
어떻게 요리해 먹어야 할지 고민 중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풀리고 열린 하늘, 유성들,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 도는 밤에 시가 내게로 왔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나뭇가지에 노랗게 매달려 있는 은행잎을 보고
시가 내게로 왔다고 합니다.
시인은 떨어지는 노란 나뭇잎이 어디로 향하는지 응시하다가
노란 은행잎을 숟가락으로 상상력을 넓힙니다.
시를 쓰는 일이 수저를 들었다 놨다 하는 동안 올 수 있고,
연포탕이 목구멍을 넘어가다 기가 막힌 시 한 줄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시인들은 오래 기다리던 시가 찾아왔지만,
그 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포근한 융단처럼, 아니면 뜨거운 연포탕처럼 영혼이 시키는 대로,
해독하면 시의 첫 줄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ㅡ박미산 시인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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