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로 글을 쓰면 문학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던
문청시절의 초심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
푸른 하늘 아래 높다랗게 치솟은 언덕 위 소나무
허리에 권총 찬 아버지 같다
어린 나는 늘 각 세우고 군기 잡혔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
점호가 시작된다
니, 오늘 머했노?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봤심더!
씩씩하게 소리쳐 대답하지만 곧바로 엎드려뻗쳐
삼형제가 차례로 줄빠따 맞고 나면
너 때문에 혼났다고 형들한테 한 번 더 군기 잡혔다
어린 나는 옆구리에 권총 찬 아버지가 무섭고 싫었다
마주치지 않으려고 문밖을 떠돌다 은둔술을 배웠다
때로 아버지의 흑백시절이 그립다
두렵기만 하던 아버지 얼굴 지금 다시 그리운 이유는
내 기억 속 권총 이미지 때문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
심장에 박제된 권총처럼
유품으로 물려받은 파카 만년필 한자루 애지중지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붙잡아 놓고
아버지 만년필로 사각사각 생의 밀어 새기노라면
빙그레 웃고 서 있는 저, 언덕 위 소나무
ㅡ 박상봉 「언덕 위 소나무」 전문
언덕 위 소나무와 허리에 권총 찬 아버지.
이 시에는 치솟은 언덕 위 소나무와 허리에 권총 찬 아버지가 어떤 공격성의 화살로 상처를 입히는 상징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권력자의 모습으로 시적 화자를 억압하고 마침내 도피하려는 마음가짐을 품게 된다. 문 밖을 떠돌다 은둔술를 배웠다는 이 표현은 한낮의 세계를 피해 저녁부터 한밤에 이르는 세계로 나가는 마음가짐으로 환기된다.
이렇게 이중적 기능을 파카 만년필로 변신한 권총의 모양에서 찾아내고, 또 언덕 위 소나무는 어떤 이중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래서 억압에 좌절되지 않는 저녁의 해방구를 드디어 찾아내고 있다.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을 기억할 것이다. 1965년에 20세기 폭스 사가 제작한 이 영화를 나는 1978년에 국내 재개봉 때 한일극장에서 처음 봤다. 그리고나서 KBS 명화극장과 MBC 주말의 영화, 케이블TV 영화채널 등 안방극장에서 여러번 더 봤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생각난다. 마리아 수녀가 폰 트랩 가의 가정교사로 들어와 장난꾸러기 7남매를 첫 대면하는 날, 폰 트랩 대령이 아이들을 호각으로 불러내 일렬로 세워놓고 점호하는 장면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
직업군인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령 예편한 아버지는 손톱만한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빈틈없는 분이었다. 아버지 계실 때는 늘 긴장해 있어야 했다. 전방 근무할 때 떨어져 살다가 오랜만에 아버지가 집에 내려오면 우리 삼형제를 열차렷 시켜놓고 점호 시간을 가졌다.
나는 늘 군기가 잡혔다.
아버지가 “오늘 뭐했냐?”고 물으면
형들은 우짜든동 “공부했심더!”하고 대답하는데, 나는 큰소리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봤심더!”
라고 당당하게 소리쳐 대답하였으니, 혼자 엎드려뻗쳐 기합을 받거나 나 때문에 단체로 줄빠따를 맞고,
“너 때문에 단체기합 받았다”며 형한테 또 군기 잡히곤 했다.
아버지는 애국자셨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와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중에 6·25전쟁이 터졌다. 같은 연배의 지식인들이 시골로 숨어들고 미국으로 도망가려고 할 때, 아버지는 스스로 자원입대를 택하였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최고의 직장으로 손꼽던 은행에 복귀하지 않고 온나라가 전후 복구에 매달려 정신없을 때 국방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소신으로 군대에 눌러 앉았다.
아버지가 논산 육군훈련소에 근무할 때 이야기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불쑥 박정희 장군이 훈련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논산 육군훈련소장과 의논할 일이 있어 왔다는데, 박장군은 몇몇 장교들과도 면담을 가졌다고 한다. 아버지도 잠깐 박장군을 만나는 자리를 갖게 되었다는데, “근무평점도 좋고 동향이라 육본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의사를 넌즈시 전하더라는 거였다.
미루어 짐작해보건데, 논산 육군훈련소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박장군이 은밀하게 쿠데타를 논의하러 왔을 터이고, 아마도 그 시기에 쿠테타를 함께 할 유능한 젊은 인재를 전국적으로 끌어모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도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차마 훈련소장과의 의리 때문에 떠날 수가 없어 박장군의 제의를 거절했다”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며 아쉬워 하시던 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글쎄, 그때 박장군을 따라나서지 않은 걸 후회하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아버지처럼 군인이 되고 싶었다. 장군이 되려고 육사에 가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삼촌처럼 의사가 되라”고 늘 말씀하셨고, 고입 시험에 낙방하고 나서는 아버지와 갈등이 심해졌다. 결국 그 갈등을 견디지못해 일찍이 가출도 하였다. 아버지는 내게 늘 관심이 많았고, 속깊은 사랑을 하고 계셨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아버지 마음을 알고 나서는 고분고분 말도 잘 안듣고 반항이 심했던 어린 시절을 뉘우쳤다.자식으로 효도 한번 잘해보려고 구미서 대구 아버지 가까운 동네로 집을 옮기기까지 했는데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인생이란 게 다 그렇더라. 뭔가 제대로 한번 해보려고 준비 다해놓고 막상 실행하려 하면 너무 늦은 때가 된다는 것.
나는 가끔 대전 현충원에 누워계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남기고 가신 파커 만년필을 만지작거린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낡은 만년필 한 자루. 1945년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장군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협정에 서명하면서 사용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그 파커 만년필이다.
만년필로 글을 쓰면 문학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던 문청시절의 초심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그래서 글이 더 잘 써지고 시상을 떠올려 종이에 옮겨 적는 행위를 통해 각별한 행복감을 느낀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2차세계대전 종전 협정에 서명해 유명해진 파커 만년필로 글을 쓰는 모습.
아버지의 나이
정 호 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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