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영화⑤] 박남철의 시 《첫사랑》과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2-01 09:50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는 충격적 고백

영상도 아름답고 순수한 마음을 일깨워주는 영화

  첫사랑


  박남철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영화《가재가 노래하는 곳》한 장면

시인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첫사랑의 좌절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이 시의 특이점은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사랑의 대상을 마주한 “그날 밤”에 “계집애”를 향해 시적 주체가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시는 이 폭력을 “얻어맞았다”로 표현함으로써 행위의 표층과 심층 사이의 간극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표면적으로든 “계집애”를 때린 것이지만, 이 행위의 심부에는 자기 환멸과 부정의 내면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여학생들의 문제제기는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었다. 이 시의 폭력은 그저 폭력일 뿐, 사랑과 무관하다는 것이다.(범주 폭력과 혐오의 시대, 균열의 발화(發話)로서의 시(詩)_ 김문주 중에서) 

 

여성의 입장에서 이 시의 폭력은 아무리 너그럽게 헤아려보아도 첫사랑의 내면으로 수렴할 수 없는 그저 병적인 범죄에 불과하다. 그렇게 볼 때 이 시의 첫사랑은 지극히 특수한, 시적 주체에게만 용인된 사적 경험이 된다. 이 비판적 견해의 단호함과 간절함에는 최근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여성들을 상대로 한 형태의 폭력에 대한 불안과 거부가 배후에 가로놓여 있다. 


이 시를 읽고 여성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남성 내부에 숨겨진 폭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떠올랐다.

영화《가재가 노래하는 곳》포스터

2022년 개봉한 미국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올리비아 뉴먼이 감독하고, 데이지 에드가 존스, 테일러 존 스미스, 해리스 딕킨슨 등이 출연한다.


영화 개봉보다 소설이 먼저 번역돼 나왔다. 이 영화의 원작은 델리아 오언스가 지은 소설『Where the Crawdads Sing』이다. 미국에서는 2018년에 발간되었고, 뉴욕타임즈에서 181주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2019년 6월 21일에 출판사 살림에서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습지 소녀로 불리는 한 여자가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어렸을 때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연만이 유일한 친구였던 카야. 그녀가 세상과 단절된 채 성장하는 가운데, 테이트가 그녀의 마음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 밀려오는 외로움 속, 체이스가 그녀에게 적극적인 고백을 하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체이스는 습지에서 추락사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고

카야는 유력한 용의자가 되어 법정에 서게 된다.


 재판을 받는데 매우 따뜻한 변호사가 카야를 변호하면서 카야가 어릴 때부터 이제까지 성장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의 편견과 홀대로 인해 어려서부터 굉장히 외롭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내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배려가 중심 주제다.


카야는 ‘습지 소녀’다. 마을과 동떨어진 습지에서 사람들과 접촉 없이 홀로 살아가는 이 소녀를 마을 사람들은 카야라는 이름 대신 ‘습지 소녀’라 부른다. 엄마와 두 언니, 오빠와 모두 함께 살던 어린 시절엔 나름 행복했던 적도 있었다. 참전의 상흔으로 괴로워하는 아버지가 휘두르는 폭력만 아니었더라면 그런대로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엄마가 먼저 떠나고 뒤를 이어 두 언니, 마지막으로 오빠까지 떠나자 어린 카야는 홀로 아버지 곁에 남는다. 


카야의 오빠는 떠나면서 카야에게 당부한다. 위험할 때는 언제든 습지 깊은 곳으로 몸을 숨기라고. 아버지마저 집을 떠난 후, 어린 카야는 야생의 환경에서 홀로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나간다.


카야가 성숙한 여성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준 두 남자(테이트와 체이스)를 만난다. 그들과의 로맨스와 갈등, 법정 미스터리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재판 과정에서 습지에서 홀로 성장하며 겪는 카야의 고독과 외로움에 마음이 아팠다가 경이로운 야생의 생존 방식에 감탄하게 된다.  

영화《가재가 노래하는 곳》한 장면

영상도 아름답고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순수한 마음을 일깨워주는 아주 따뜻한 이야기다. 영화는 원작 소설의 탄탄한 스토리와 글로 된 문장의 서정성이나 문학적인 표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원작을 거의 그대로 구현하려고 노력한 듯하다. 작가의 풍경 묘사가 워낙 섬세해서 소설 속 습지 풍경을 영상으로 구현하기 용이했던 것일까? 영화의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습지의  아름다움과 매력적인 배우들의 다채로운 캐릭터가 오밀조밀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여자 홀로 살아낸다는 것은 21세기에도 녹록지 않은 일인데 이 작품의 배경인 1950~1960년대 여성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어떻게 카야는 가족의 상실 이후에도 삶에 대한 끈을 단단히 쥐고 살아낼 수 있었을까. 권력관계의 우위를 점하고 자신의 삶을 통째로 쥐고 흔들려는 자에게 결코 굴하지 않는 야생녀 카야의 용기가 놀랍도록 생동한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카야를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 테이트와 카야가 한때 사랑이라 착각했던 남자 체이스를 통해 남성 유형의 양 극단을 보게 된다. 어릴적부터 카야를 지켜본 테이트는 환경이 불우해 보인다고 여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카야에게 글을 가르치고 책을 읽게 함으로써 카야의 자립 능력을 돕는 조력자가 된다. 습지 생물을 관찰하고 삽화로 그리기를 좋아하는 카야의 재능을 발견하고 출판사 목록을 전해주고 출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안내해준 데이트는 카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을 할 줄 아는 남자다.


반면에 체이스는 습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카야의  재능과 그녀의 세상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카야를 오로지 자기만의 소유물로 대한다. 입으로는 사랑을 담지만 카야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체이스의 시선은 육지 사람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않다. 오히려 그녀의 고립된 처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만 채우려 할 뿐이다. 심지어 자기 욕망의 실현을 위해 폭력까지 행사한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기가 본 그대로를 사랑하는 테이트와 세상의 기준에 자신의 욕망을 더해 사랑이라 믿고 강요하는 체이스. 여성들은 평생 함께 할 남자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잘 생각해볼 일이다.

영화《가재가 노래하는 곳》한 장면

특히 이 영화는 남성 내부에 숨겨진 폭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무엇이 남성으로 하여금 여성에 대해 폭력적이 되도록 하는가? 엄마와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을 보고 당하면서 자란 카야는 체이스의 폭력 성향을 극혐한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한 여성이 어릴 때부터 당하고 살아온 남성의 폭력성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다. 육지에서는 발 붙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결국 내몰리다 정착하게 되는 곳이 습지다. 이곳에서 가족을 모두 떠나보내고 홀로 살아가는 카야의 외로움은 북적이는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외로움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인종과 성, 자연과 문명, 생태적 삶 등 다양한 삶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원작 소설도 읽어볼만 하다.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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