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장소㊹] 노공이산, 산을 옮기려 했던 사람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9-01 05:17

모두가 이로움을 좇을 때 홀로 의로움을 따랐던 사람

9월 1일은 노무현 대통령이 태어난 지 80년 되는 날

『노무현 평전』의 출간이 그래서 더욱 뜻깊다

노공이산 


박상봉


그 여름 속리산 자락에서 시회를 가졌다

천왕봉 바라보이는 피앗재 산장에

아홉 시인이 모여 난상토론을 벌였다


장엄송은 바빠 못 오고

보은 사는 송시인이 참석했다


주제는 찔레꽃이다

찔레꽃, 밤늦도록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고

말 잎사귀만 서걱댔다


사는 일이 그저 야단법석이다

토론은 접어두고 이부자리 깔고 누웠는데

지붕 두들기는 빗소리 크게 들린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빗소리에 울퉁불퉁 마음만 구겨지는 한밤중

만수리 산마을 물안개 자욱하다


멀리 보이는 불빛 한 점 자꾸 멀어져간다

내가 걸어온 산길이 환한 봄날인 줄 알았는데

화나는 봄날이다


찔레꽃 피고 지고 난 뒷자리 돌아보니

인생 성적표가 너무 부끄럽다


방향도 없이 달려온 십대와 이십대는 영락없는 F학점

물에 빠진 놈처럼 허우적대며 방황한 삼십대는 D학점

사십대 고갯마루는 견디기 힘든 치통 같다


인생은 재수강도 안 되는 과목이라

별반 나아질 것도 없는 나이지만 쉰 넘어

노공이산을 생각한다


요즘 나의 치열한 화두가 그렇다

작은 산 하나 옮겨보려는 것인데

흙 한 삽, 돌멩이 한 개,

미련도 부지런 떨다 보면

산이 평지가 되고 길이 되고 구름도 될 수 있음이라


환난의 무더위를 보낸 여름은

쉰 넘긴 남자의 바람기 같다

징글징글 뜨겁던 땡볕도 금세 시들어버리고

작은 희망의 날개조차 가시에 찔려 떨어지고


속수무책 점령당한 불화의 시대,

목덜미 서늘해지는 바람, 가을 벌써 문밖에 와 있다


*‘노공이산(盧公移山)’은 ‘어리석은 노인의 우직함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을 빌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뒤 사용했던 필명이다. 


노공이 산을 옮기다는 뜻으로 어떠한 곤란도 두려워하지 않고 굳센 의지로 밀고 나가면 못해낼 일이 없다.한때 나에게 ‘노공이산’이라는 말이 오래 화두로 남아 있었다. 쉰을 넘기면서였다. 지나온 생을 돌아보면 잘한 일보다 부끄러운 일이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인생을 학교 성적표에 빗대 십대와 이십대에는 F학점, 삼십대에는 D학점을 매겼다. 인생에는 재수강도 없으니 지나간 시간을 다시 고칠 수도 없다.


그때 생각한 것이 산 하나를 옮기는 일이었다. 한꺼번에 옮길 수는 없어도 흙 한 삽 뜨고 돌멩이 하나 치우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산이 길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내가 받아들인 ‘노공이산’이었다.


그 말의 주인이 살았던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도 갔었다. 마을 뒤편에는 봉화산이 있고 그 산자락에 부엉이바위가 있다. 사진으로 다시 보아도 거대한 바위는 말이 없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산과 바위는 그 자리를 지킨다. 대통령의 생가와 묘역,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을 돌아보았다.


봉하마을 묘역 바닥의 박석에 새겨진 김제동의 글귀봉하마을에서는 묘역 바닥의 박석에 새겨진 글들도 오래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김제동의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였다. 아주 짧은 문장이지만 그곳에서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말이었다.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얼굴과 목소리만 기억하는 일이 아니라 그가 어떤 세상을 꿈꾸었는지를 함께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등신대 옆에 서서 사진도 찍었다. 노란 목도리를 두른 모습 옆에서 노란 바람개비를 들기도 했다. 대통령과 나란히 서 있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사진이지만 지금 들여다보면 웃음보다 먼저 세월이 보인다. 살아 있는 사람은 나이를 먹고, 사진 속 사람은 그날의 모습 그대로 남는다.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의 등신대 옆에 서서 사진도 찍고 노란 목도리를 두른 모습 옆에서 노란 바람개비를 들기도 했다.노무현이 200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말했던 것은 거창하면서도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인 사회였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풍토를 청산하고, 원칙과 신뢰가 서는 사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보람을 느끼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 말을 다시 읽으면, 그가 옮기려 했던 산이 얼마나 컸는지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운명이다』를 읽었다. 책 속에는 정치인 노무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했던 어린 시절, 자전거를 타던 청년, 고시 공부를 하던 사람, 변호사, 정치인, 대통령, 그리고 다시 봉하마을로 돌아간 한 인간의 생이 들어 있었다.


특히 봉하마을을 생각하면 그의 마지막 글을 피할 수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라는 문장은 지금도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마지막에 남긴 “집 가까운 곳에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라는 뜻처럼 그의 묘역에는 화려한 비석 대신 낮은 너럭바위가 놓였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노무현을 기억한다.


누군가에게는 대통령이고, 누군가에게는 실패와 좌절을 겪은 정치인이며, 누군가에게는 지역주의라는 거대한 산을 옮기려 했던 ‘바보’다. 나에게는 무엇보다 ‘노공이산’이라는 네 글자를 남긴 사람이다.


노무현 탄생 80주년을 맞아『노무현 평전』이 나왔다. 

공교롭게도 노무현 대통령 탄생 80주년을 맞아 첫 공식 『노무현 평전』이 나왔다. 노무현재단이 기획하고 참여정부에서 대변인·제1부속실장·연설기획비서관 등을 지낸 윤태영이 약 10년에 걸쳐 집필한 928쪽의 책이다. 노무현의 구술과 공적 자료뿐 아니라 참모들의 메모와 녹취록, 비망록 등 160여 개의 비공개 기록을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다시 구성했다고 한다. 


책의 방향을 압축하면 ‘기억 속의 노무현’에서 ‘역사 속의 노무현’으로 옮겨가는 작업이라 할 만하다. 인권변호사와 청문회 스타, 지역주의에 맞선 정치인, 대통령뿐 아니라 봉하마을로 돌아온 한 인간까지 생애 전체를 들여다본다. 


마침 오늘, 9월 1일은 노무현 대통령이 태어난 지 꼭 80년이 되는 날이다. 『노무현 평전』의 출간이 그래서 더욱 뜻깊다. 이제 그를 직접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은 조금씩 역사가 되어간다. 한 시대의 뜨거운 지지와 반대도 시간이 지나면 기록 앞에서 다시 평가받을 것이다.


봉하마을에서 바라본 봉화산과 부엉이바위, 바닥에 새겨진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장, 그리고 오래전 속리산 피앗재 산장에서 썼던 내 시 「노공이산」이 오늘 한자리에서 겹쳐지는 아침이다.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한 사람이 평생 옮기려 했던 산은 아직 다 옮겨지지 않았다.

반칙과 특권의 산, 지역주의의 산, 불신과 불평등의 산.

그러므로 노공이산은 끝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흙 한 삽, 돌멩이 한 개.

산을 옮기는 일은 결국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연민의 실타래와 분노의 불덩어리를 품었던 사람 모두가 이로움을 좇을 때 홀로 의로움을 따랐던 사람(유시민)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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