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실 배경으로 '먹고 먹히는 행위' 통해 신체 소모 표현
노화·노동·돌봄 등 문제 다뤄…2∼20일 두산아트센터
연극 '갱更' [두산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환각 속 은색 칼과 각종 식기가 번쩍거리는 조리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조리대에 누운 노인 '천태'의 몸에 조리실 직원들이 탐욕스럽게 달려든다. 천태의 손녀 '피영'은 천태의 팔을 잘라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초연 개막을 하루 앞둔 1일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시연된 연극 '갱更'은 이같이 '몸'을 소재로 소모되는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출연진에는 배우 공상아·김은희·조하석 등이 이름을 올렸으며 오는 2∼20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상연된다.
작품은 청년 창업 조리실을 배경으로 조기 갱년기를 맞이한 피영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렸다. 재정난으로 간신히 조리실을 꾸려 가는 피영 앞에 갑자기 엄마 금옥이 통장을 내민다. 공장에서 왼쪽 팔을 잃은 피영의 할아버지 천태의 산업재해 보상금이다.
피영은 어린 시절 금옥을 버린 천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조리실의 위기를 넘길 수 있는 1억3천만원이라는 돈을 두고 갈등한다.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몸은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소모된다.
노화에 의해, 생존을 위한 노동에 의해, 돌봄이나 부양에 의해. 먹고 살기 위해 위험한 일을 하다가 팔을 상실한 천태의 몸이 대표적이다. 작품에는 20대부터 80대까지 각기 다른 정도와 방식으로 소모되는 몸들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조기 갱년기'라는, 또래에 비해 다소 빠른 신체적 소모를 경험하는 피영이 있다. 시종일관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함을 호소하는 그는 "유통기한이 지난 것처럼 내 남은 시간에 확신이 없어져 버렸다"고 당황스러워한다.
연극 '갱更' [두산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날 시연 후 연합뉴스와 만난 '갱更'의 작가 겸 연출가 본주는 "작품은 실제로 겪은 조기 갱년기 경험에서 출발했다"며 "알고 있는 감각에서 출발해, 준비되지 않은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마주해야 하는지 질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품에서 갱년기는 단순한 노화의 증상은 아니다. 피영에게 갱년기는 어머니나 할아버지와 같이 기성 세대에 새로이 진입해 몸이 소모되는 것을 뜻한다.
피영은 몸의 소모에 혐오감을 느낀다. 돈을 갖다주기 위해 소모된 천태의 몸, 자식과 남편 부양에 소모된 금옥의 몸, 무엇보다 남의 밥을 해주면서 스스로는 잘 먹지 못하는 자신을 혐오한다. 피영은 "노인네의 쓸모없어진 몸을 보면 화가 난다"고 말한다.
극에서 '소모'는 먹고 먹히는 행위로 드러난다. 피영이 천태의 몸을 "1억3천만원짜리 왼팔"이라며 뜯어먹는 자신의 환상을 보는 장면이 그 예다.
피영은 자식의 재정난 해결을 위해 천태를 부양하려 하는 금옥에게 "내가 엄마를 뜯어먹는 것 같다"며 절규한다. 자식에게 돈을 주고 기대려고 온 천태에게는 "자식을 뜯어먹으려 한다"고 비판한다. 부모와 자식 간 '먹는 행위'에 피영은 진저리 친다.
연극 '갱更' [두산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나 작가는 먹는 행위를 마냥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장애인의 자식으로 살아갈 아픔이 걱정돼 딸을 양부모에게로 보낸 천태의 마음, 평생 자식을 위해 희생한 금옥의 마음 등을 이해하게 되며 피영은 먹는 행위 또한 각 세대가 존재했던 시대의 상황 속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음을 재발견한다.
또한 가족은 물론 조리실과 고객을 책임지고 먹여 살려야 하는 새로운 자신의 역할을 깨닫는다. 피영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먹는 게 아니라 삼켜 보겠다"고 말한다.
본주는 이에 대해 "먹는다는 행위는 처음에 부도덕하게 타인을 소비·소모한다는 의미로 읽히지만, 결국 '소모됨을 수용하고 이를 끌어안고 가겠다'라는 의미로 점차 바뀐다"며 피영이 이를 '삼키다'로 표현했다고 전했다.
'고치다' 혹은 '다시'의 뜻을 가진 한자를 쓴 제목 '갱更'의 의미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본주는 "피영은 결국 천태의 보상금과 몸(부양)을 모두 갖고 간다는, 새로운 선택을 한다"며 "선택과 가치관을 다시 고쳐 나간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작품은 극 중 내내 갱년기의 영향으로 음식을 잘 못 먹던 피영이 가족과 조리실, 고객인 어린아이들을 위해 죽을 삼키는 장면으로 막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