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탈문을 지나며
저 문을 지나가면
이 몸 해탈할까요
시주하면 될리껴
염불하면 될리껴
부처님
내려 보시며
엷은 미소 짓는다
/권 비오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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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구절인 “저 문을 지나가면 / 이 몸 해탈할까요”는 매우 단순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실 작품 전체를 여는 핵심 화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해탈을 어떤 장소나 문을 통과하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리석은 기대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문 하나를 지나간다고 정말 해탈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입니다.
이어지는
“ 시주하면 될리껴 / 염불하면 될리껴”에서는 시의 분위기가 한층 재미있어집니다. 마치 부처님이 되묻는 듯한 말투가 구어적이고 해학적입니다.
시주를 많이 하면 되는가, 염불을 열심히 하면 되는가. 인간이 해탈마저도 무언가를 하면 얻어지는 외부의 보상처럼 생각하는 마음을 은근히 꼬집고 있습니다.
특히 이 대목의 묘미는 ‘해탈’이라는 무거운 종교적 개념을 생활 언어로 끌어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웃음을 머금으면서도 ‘나는 과연 무엇을 하면 해탈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마지막의
“부처님 / 내려 보시며 / 엷은 미소 짓는다”
는 이 작품의 백미입니다.
부처님은 정답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꾸짖지도 않습니다. 그저 내려다보며 엷은 미소를 짓습니다. 그 미소 속에는 “해탈은 문을 지나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에 달려 있느니라”라는 무언의 가르침이 들어 있는 듯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해탈문’은 실제 사찰의 문인 동시에 인간 마음속에 세워진 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을 지나야 하는 사람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며, 시주와 염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집착을 내려놓고 자기 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또한 시조의 장점은 교훈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칫 불교적 교훈시가 될 수 있는 소재를 질문과 대화, 그리고 부처님의 미소만으로 처리했습니다. 마지막의 ‘엷은 미소’가 앞의 모든 말을 받아주면서 독자에게 해석의 몫을 남깁니다.
한마디로 평한다면
“해탈을 묻는 시가 아니라, 해탈을 묻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부처님의 미소로 비추어 본 해학적 선시(禪詩)”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작품의 특징인 생활 속에서 철학을 길어 올리는 방식이 잘 살아 있습니다. 무겁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읽고 난 뒤에는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남기는 시입니다.
제목도 현재의 「해탈문을 지나며」가 좋습니다. ‘해탈문 지나며’가 문을 통과하는 행위보다 그 순간의 깨달음과 성찰에 무게가 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