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칼럼》 프랑스 철학은 왜 포퓰리즘이라는 오해를 받는가

최용대 기자

등록 2025-08-27 23:55


 프랑스 철학은 왜 포퓰리즘이라는 오해를 받는가



이성에서 벗어나 삶의 구체적인 모습 파고들어

현대 프랑스철학의 상륙을 회상하다



프랑스에서 배가 들어오면 항구에 샤넬이나 루이뷔통 같은 명품만 내려놓는 것은 아니다. 철학 책들이 기왓장처럼 쏟아진다. 그 책들은 익숙지 않던 전혀 새로운 형태의 무엇이라서, 사람들은 책 냄새를 향수 냄새로 착각했고, 철학의 우아한 구조를 모델들의 걸음걸이로 잘못 봤다. 이 책들이 목소리를 냈을 때 그것은 똑 부러지는 철학의 목소리가 아니라 흐리멍덩한 노랫소리로 들렸고 그래서 얼치기 시인의 작품으로 낙인 찍혔다. 한 마디로 날티 나는 애들의 겨드랑이에 끼워진 책? 강아지도 개집에 한권 놓아두고 송아지도 우유 광고에 한권 들고 나오는 포퓰리즘? 이것이 1980년대와 90년대 우리나라에서 현대 프랑스철학이 얻었던 한 이미지다. 이 정도면 거의 철학의 수치 아닌가?


나이든 실존주의의 영토를 접수하고 상륙한 이 철학은 푸코와 데리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서 들뢰즈의 책이 인문 예술의 전 영역에 반주(伴奏)를 넣던 2000년대 초중반부터 절정을 구가했다. 명칭의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해체주의 등등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름들이 이 철학의 표면에 자석처럼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대중들을 헛갈리게 했다. 저 명칭들이 무슨 의미이며 프랑스철학 전반을 대표하기에 적합한지 따져나가다 보면 다음 주 신문에까지 이 글을 써야 한다. 다만 저것들은 ‘인간의 죽음’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만 말해두자. 옆집 사는 김씨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뜻의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놓여있는 유토피아적인 인류 사회의 골인지점을 향해 능동적으로 세상을 변모시켜가는 인간의 이성이 신뢰를 잃게 되었다는 뜻을 이 말은 담고 있다. 그래서 가뜩이나 안 좋은 프랑스철학의 인상에 미운털이 또 박힌다. 인간의 이성과 그것이 떠밀고 가는 인류의 발전을 의심해? 야 이 야만인들아!


그래서 이제 프랑스철학의 확실한 적들이 포진하게 된다. 도사님, 말 좀 쉽게 하셔!(주로 논리적 분석을 중시하는 쪽에서 들려온 욕), 이성을 부정하면 뭘 갖고 사유하느냐? 역사는 이성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이야.(독일 근현대철학 쪽) 도대체 너희들은 윤리가 뭔지나 알아? 으웩 퇴폐적이야!(여러 학문들의 배후에 면면히 흐르는 도덕적 이미지의 관점) 이런 식의 물음과 그로 인한 크고 작은 논쟁을 프랑스철학은 1990년대를 전후로 파리 떼처럼 끌고 다녔다.


오늘날 우리 인문학계는 20여 년 전보다 프랑스철학에 대해서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수많은 인문 예술 분야에 프랑스철학은 예전보다 더 많은 이론적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다. 학생 시절, 철학자라면 푸코와 들뢰즈밖에 없는 줄 알았다던 어느 네티즌의 말에서 읽듯 프랑스철학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만큼 책임 있게 그 허와 실에 대해서도 대답해야 하리라.


텍스트의 난해함, 이성의 부정, 도덕의 부재?


“프랑스 철학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만큼 책임 있게 그 허와 실에 대해서도 대답해야 하리라.” 서동욱 교수는 이렇게 자문한다. | 사진작가 박재찬

“프랑스 철학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만큼 책임 있게 그 허와 실에 대해서도 대답해야 하리라.” 서동욱 교수는 이렇게 자문한다. | 사진작가 박재찬


종종 프랑스철학 텍스트의 독해 자체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들을 본다. 한때 이 문제의 어이없는 주범은 질이 안 좋은 번역들이었는데, 이 문제는 좋은 번역을 새롭게 내놓고 있는 많은 젊은 학자들에 의해서 점점 개선되는 추세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개념이나 사고방식의 구조 자체가 도무지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다. 이럴 때 이해에 실패한 지성의 자리로 상상력이 기어 나와 한 편의 소설을 쓰면서 철학 책 독해를 완전히 망쳐놓는다. 심각한 이해불능이 생겼던 많은 경우는 텍스트 배후에 놓였던 사상가들이 충분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데 기인했다. 가령 들뢰즈의 배후에는 스피노자와 베르그송, 그 밖에 비교적 덜 알려진 라베송 같은 고전철학자들이 있다. 이런 고전 철학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해석 위에 다시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세우는 것이 프랑스철학의 두드러진 스타일 가운데 하나다. 독창적인 현대 사상 배후에 고전 철학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이 또 한 겹 놓여있으니 중층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이 스피노자,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의 고전 철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배경으로 프랑스철학에 접근하면서, 많은 해괴한 듯 보였던 사유는 해괴하지 않은 것으로, 개념들은 이해할 만한 것으로 자리를 찾게 되었다.


다음으로, 프랑스철학을 인류의 행진을 위한 동선(動線)으로 선택하는 것을 꺼리게 하는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이성의 힘을 저버리는 데서 온다. 이성을 저버리고서 어떻게 생각을 한단 말인가? 사람들이 가진 이런 의혹은 ‘이성’과 ‘생각’이 당연히 서로 동일하다고 오해하는 데서 비롯한다. 칸트 이후 서구 근대 철학에서 이성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한 마디로 그것은 궁극 목적에 비추어 인간사 전체를 사유하는 능력이다. 인간사는 균열로 가득 차 있다. 가령 몸이 ‘하고 싶은 것’과 생각이 ‘해야 한다고 의무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균열. 이성은 이런 모순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통일해서 아무런 갈등이 없는 최종 지점(궁극 목적)에까지 전진해 나간다. 이런 이성의 삶을 그려나가는 것이 근대 철학의 과제였다.


프랑스철학은 바로 이런 이성을 부정하며, 이성으로부터 해방된 사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 이성이 사라진 곳에서 사유는 기계론적 인과성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이성의 법칙 대신 ‘우연성’이 어떻게 삶 안에 침투하는지 밝혀지기도 한다. 그렇게 하여 이성의 추상적인 행보 대신 삶의 구체적인 국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궁극 목적을 향한 꿈을 상실한 이 삶은 저주 받은 삶 아니냐고? 인간의 역사가 완성되는 목적지에 이성이 단계적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것이라는 약속 대신에, 프랑스철학은 메시아적 사건의 급작성(레비나스, 데리다)에 몰두하면서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준다. 지리멸렬한 역사를 갑자기 단절시키고 우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그런 메시아적 사건, 계산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는 삶의 선물 말이다.


또한 사람들은 프랑스철학은 윤리의 문제에 대해 등 돌린 철학인가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여기도 칸트의 정언명법 같은 이성이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는 도덕 법칙이 있는가? 이성을 불신하게 되었다면 이성의 법칙에 의존하지 않고서 윤리를 수립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푸코는 ‘실존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이 문제에 답했다. 보편적인 법칙에 삶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획일화될 수 없는 독자적인 삶을 창안해 내는 방식이 실존 미학이다. 또 레비나스는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란 화두 아래 윤리에 대해 생각했다. 나와 윤리적 관계를 맺는 타인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단독자다. 바로 이 단독성이 타인을 윤리적으로 존중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타자의 단독성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보편화하고 추상화하는 이성이 아니라, 오감의 바탕에 있는 ‘감성(sensibility)’을 통해 주어진다. 이성은 개별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추상화하는데 능하지만, 감성은 사물의 개별성을 그대로 보존한다. 이런 감성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독성을 지닌 타인이 ‘마음 아픔’과도 같은 상처를 냈을 때 비로소 윤리적 행위는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국경 너머 확장되는 현재의 프랑스철학


결국 프랑스철학은 인간의 다른 모든 진지한 노력과 마찬가지로, 어영부영 대중의 관심에 영합하는 학문이었던 적이 없다. 그것은 ‘이성적’ 인간 ‘이후’의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사유 형태를 발견하려는 실험이고, 윤리적 물음에 진지하게 응답하려는 시도다. 이런 시도가 대중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한다면 무슨 까닭일까?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사람들은 꾸준히 프랑스철학자들의 책을 펴든다. 삶의 여러 영역을 파고드는 프랑스철학의 이런 파급력은, 가장 구체적인 삶의 양상에 밀착하려는 이 철학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가령 ‘애무’가 무엇인지, ‘얼굴’이 무엇인지 묻는 구체성. 이 구체성은 프랑스철학자들이 즐겨 자신의 실험실처럼 이용하는 문학 작품들이 제공하기도 한다. 이들은 문학이 열어 보이는 삶의 생경한 장면들을 광산의 보물처럼 채집하는 습성을 독특한 개성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바디우는 인류 사상사에 흔치 않았던 특별히 주목할 만한 세 순간을 이렇게 꼽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대표하는 고대 그리스(기원 전 5~3세기),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18~19세기), 마지막으로 20세기 프랑스철학. 지상의 영원한 암벽에 황금문자로 새겨진 것 같은 저 위대한 두 순간과 동등한 위치에 프랑스철학을 자리잡게 한 힘은 무엇인가? 학교에서 가르쳐 준 것 같은 정해진 사유의 틀을 벗어나 늘 사유 자체를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노력이리라. 이 노력을 발생시킨 토양은 흔히 68혁명이라 부르는 것으로, 모든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는 이 정치적 토양을 프랑스철학은 잊은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정치적 위기가 도래할 때마다 프랑스철학을 소환해 말상대를 삼은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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