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칼럼] 자멸의 서곡 여의도 섬으로 남을 것인가, 다리가 될 것인가 _이원희 기자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5-12-02 10:56

두물머리가 주는 정치적 성찰



 한강 중심에 위치한 여의도는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의 심장부이다. 국회의사당과 주요 금융기관, 방송사가 밀집된 국가의 중대 결정이 이루어지는 권력의 중추다. 그러나 이러한 집중성은 양날의 검으로 한강이 형성한 자연적 경계와 여의도 정치는 시민의 일상과는 달리 유리된 '섬'이나 '그들만의 리그'로 고립되고 있다.

 

지리적으로 현재 우리 정치의 본질을 상징하며 물리적으로는 도심 한가운데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의 삶과 멀어진 정치 공간 여의도발 뉴스를 접하며 시민들은 정치가 다루는 의제와 국민이 체감하는 현실 사이 거리감이 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63년 워싱턴 대행진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닌 인격의 내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라고 외쳤다. 이 선언은 인종차별 철폐와 본질적 가치에 기반한 평가를 요구하는 보편적 정의의 외침이었다.

오늘날 여의도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정치인을 당적이 아닌 정책의 질로, 진영 논리가 아닌 국민을 위한 정치로 평가하고 있는가? 킹 목사 시대의 미국이 인종이라는 표식으로 사람을 구분했다면, 현재 한국 정치는 여야라는 이분법적 진영 논리로 모든 이슈를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1950-60년대 미국 남부의 인종 분리 정책은 인간 존엄성을 짓밟는 제도화된 차별이었다. 버스 좌석은 백인과 흑인으로 분리되었고, 공공시설은 'White Only'와 'Colored Only'로 나뉘어, 같은 물을 마시고 같은 공간을 이용하는 것조차 불허되었다.

이러한 극단적 분리는 한 집단에 대한 체계적 열등감 부과와 시민권 박탈이었다. 킹 목사와 시민권 운동가들은 비폭력 저항을 통해 이 부당한 분리에 맞섰고, 결국 통합과 평등의 길을 열었다.

물론 현재 여야 대립을 인종차별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 위험한 구조적 유사성이 도사리고 있다. 한국 정치는 반대 세력을 경쟁자가 아닌 제거 대상으로 간주하는 적대의 정치로 전락했다. 정책의 내용은 실종되고, '누가 제안했는가'라는 진영 논리만이 판단 기준이 된다. 공존은 배신으로, 협력은 굴종으로 낙인찍히는 혐오의 정치가 여의도를 지배한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팬덤 정치라는 기형적 구조로 고착화되었다는 점이다. 정책도 이념도 실종된 채, 오직 '우리 편 수장'이 권력을 쥐는가 마는가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이는 정치의 퇴행이다. 국민의 삶은 이 권력 게임의 볼모가 되어, 정쟁의 제단에 끊임없이 희생되고 있다. 킹 목사가 맞서 싸운 것이 제도화된 차별이었다면, 우리가 맞서야 할 것은 제도화된 적대와 혐오이다.

 

양평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은 만난다. 각기 다른 발원지에서 출발한 두 물줄기는 합류 지점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때로 격렬하게 부딪친다. 그러나 이 충돌은 파괴보다 통합의 과정이다. 두 강은 결국 하나의 한강이 되어 수도를 관통하며 국토를 적시는 생명수가 된다.

이는 여야 정치의 이상적 모델을 제시한다. 여당은 국정 운영의 책임과 추진력을 담당하고, 야당은 견제와 대안 제시를 통해 권력의 독주를 막는다. 두 역할은 대립적이면서도 상보적이다. 충돌과 논쟁은 민주주의의 건강한 증표이지만, 그 궁극적 목표는 국가 발전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문제는 현재 우리 정치가 두물머리의 소용돌이에만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합류가 아닌 충돌 그 자체가 목적이 된 듯한 경쟁, 국민의 삶이라는 하류를 망각한 채 상류의 물살 다툼에만 몰두하는 모습. 이는 정치의 본질적 목적을 상실한 위험한 상황이다.

 

대한민국은 침몰하고 있다. 저출생으로 국가는 소멸 위기에, 고령화로 복지 시스템은 붕괴 직전에, 양극화로 사회는 분열 일보직전에 서 있다. 그러나 여의도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24년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파국은, 이 나라 정치가 국가의 생존보다 권력 투쟁을 우선한다는 잔혹한 증거였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이후에도 여의도는 여전히 '네 탓이냐 내 탓이냐'를 가리는 책임 공방과 그들만의 리그에만 몰두하고 있으며 이에 더 심각한 것은 정치인들이 공신력 있는 도구로 국민을 활용해 두 진영으로 분열시켜 당 세력 확장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국민은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우리 편'을 늘리기 위해 '저쪽'을 악마화하고, 분노를 조장하며, 증오를 부추긴다. 이것이 정치라 말할 수 있겠는가?

 

정치의 본질을 망각한 자들에게 묻는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론하고 타협하며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갈등을 중재하며, 공익을 실현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그러나 지금 여의도에는 토론 대신 고함이, 타협 대신 강요가, 합의 대신 표결이 난무한다. 이것은 정치의 실종이다.

 

정치인들이여, 각성하라.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의 근본이 뭔지를 먼저 묻는 전환과 상대는 섬멸해야 할 적이 아닌 이 나라를 함께 짊어져야 할 동반자다. '국민에게 무엇을 먼저 해야 하며 무엇이 이로운가?' 경쟁은 하되 파괴하지 말고, 비판은 하되 '대안 없는 비난'은 그만두며, 권력을 추구하되 '국익을 볼모'로 삼지 말라. 이것이 정치인의 최소한 의무다.

 

킹 목사는 피부색을 초월한 사회를 꿈꿨다. 한국 정치는 당색조차 초월하지 못하고 있다. 당신들이 '나의 편'이 아닌 '대한민국의 편'에 설 때까지, 여의도는 섬으로 남을 것이다. 국민과 단절된, 물로 격리된, 스스로를 유배시킨 권력의 섬. 그곳에서 벌이는 게임은 치졸한 밥그릇 싸움뿐이다.

두물머리의 강물은 결국 하나가 된다. 그러나 여의도는? 충돌만 있고 합류는 없다. 논쟁만 있고 합의는 없다. 대립만 있고 협치는 없다.

역사는 분열된 정치가 어떤 결말을 맞는지를 반복적으로 증명해왔다. 로마 공화정은 원로원과 민회의 대립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무너졌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좌우 극단의 충돌 속에서 민주주의를 스스로 포기했다. 분열된 정치는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자멸의 서곡일 뿐이다.

여의도가 섬으로 남을 것인가, 다리가 될 것인가. 선택은 지금 그곳에 있는 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국민은 더 이상 편 가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이 나라를 지키고 미래를 여는 정치다. 두물머리처럼 합류할 수 없다면, 여의도는 역사의 심판 앞에 설 것이다. 그때 묻게 될 것이다.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답을 할 수 있는가?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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