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라는 추상이 무너지고 '같은 처지의 사람'

1914년 12월 25일,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독일군 참호에서 울려 퍼진 "Stille Nacht"에 영국군이 영어 가사로 화답하며 전쟁 사상 가장 비현실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독일군과 영국군, 프랑스군 병사들은 무인 지대에서 악수를 나누고 초콜릿과 담배를 교환했다.
전쟁을 멈춘 것은 사령부의 명령이 아니었다. 추위에 떨던 병사들의 인간적 반응, 총구보다 먼저 움직인 교감이었다.
이들이 싸움을 멈추고 함께 성가를 부른 심리 상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적'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무너지고, '같은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실재로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영하의 참호에서 떨고 있는 것은 독일인도 영국인도 아닌,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 사람의 아들이고 남편이었다. 성탄절이라는 공통의 문화적 기억이 국적과 군복보다 강력한 연결고리가 되었고, 노래라는 비언어적 소통이 총탄보다 먼저 국경을 넘었다.
Daily Mail 1914년 12월 31일 목요일
'크리스마스 휴전'은 '적'이라는 추상이 무너지고 '같은 처지의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는 평화를 가능함으로 증명해 주었으며, 전쟁이 만들어낸 '적대'조차 인간의 본능적 공감 앞에서는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네 번째 겨울을 맞았고, 가자지구의 폐허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총성 없는 전쟁이다. 환율 전쟁, 수출 규제, 에너지 무기화, 기술 패권 산업 스파이, 경쟁. 국가들은 경제 전장에서 그래프와 서명으로 싸운다. 문제는 이 싸움의 피해가 고스란히 일반 시민에게 전가된다는 점이다. '생존의 위기'라는 공통의 현실 속에 고금리와 물가 상승, 치솟는 난방비와 대출 이자로 소상공인과 가정은 무너지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사회 시스템의 마비다. 정치는 기능을 상실했고, 국민은 감정적 대응에 빠졌으며, 사회는 사고력을 잃었다. 전쟁을 끝낼 실질적 조건보다 전쟁을 지속해야 유리한 외교적 논리만 확대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진보'와 '보수'라는 추상적 진영 뒤에 가려진, 고금리에 짓눌린 자영업자, 전세 사기로 무너진 청년, '세대 갈등'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일자리를 잃은 50대와 미래가 없는 20대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한다. '지역 대립'이라는 낡은 구도는 같은 경제 위기로 고통받는 시민들을 갈라놓는다.
이젠 '적' 만들기를 멈추고, '같은 처지'를 인식해야 하며 정치인과 언론이 만들어낸 '적'이라는 플레임에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의 오판과 경제의 충돌이 일상의 파국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윤리의 회복이다. 그 윤리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전쟁이 끝나도 삶은 계속 무너진다.
1914년 크리스마스, 눈발 속에서 성가를 주고받던 병사들은 진정한 적은 철조망 보다 인간애를 포기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024년 겨울, 구세군의 냄비 소리와 캐롤이 울려 퍼지는 지금, 고요한 밤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마음이 먼저 고요해질 때, 비로소 사회가 평화로워지기 때문이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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