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화 보시라고 화엄사 각황전 꽃살문 열어뒀다
색주가 배꼽 예쁜 여자를 몰래 떠올렸다
물고기 떼 주렁주렁 매달린 열반의 세계
겹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듯 화엄의 길 앞에 선다

홍매화 열반
이복희
절정인 홍매화 보시라고
화엄사 각황전 꽃살문 열어뒀다
절간에 깃든 요염한 자태
도반들은 사문에 들기 전
색주가 배꼽 예쁜 여자를 몰래 떠올렸다
붉게 물들인 경내에서
열반의 소망은 붙었다 꺼지는 심지
그을음만 남을 줄 알면서
터진 꽃망울 걷어차고 간 흰 구름에게
염화미소가 부처의 답이다
무언가 탁, 터지는 소리
몸속에 피던 꿈들도
심지의 눈빛에 걸릴 때
눈물이 촛농처럼 왈칵 쏟아지겠지
숨 몰아쉬며 홍매를 바라보던 부처가
연화 좌대에 얹어둔 무릎 아래쪽을
슬쩍 꼬집는 순간,
만개한 홍매화
예불 올리는 자태가
물고기 떼 주렁주렁 매달린 열반의 세계다
ㅡ『오래된 거미집』(모악, 2022)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사진=박상봉 기자)
섬진강 따라 봄을 만나러 갔다. 수령이 300년 넘은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는 희귀한 빨간색 홑꽃으로 통도사 자장매, 백양사 고불매, 선암사 선암매와 함께 우리나라 대표 매화 사대천왕으로 손꼽히는 명화다.
화엄사 홍매화는 “일명 장육매(丈六梅), 각황매(覺皇梅), 화엄연화장 세계에 있다고 하여 화엄매(華嚴梅), 각황전 삼존불(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다보불)을 뜻하는 삼불목(三佛木)”이라고도 부른다. 3월 초중순 경 홍매화가 검붉은 꽃을 피우는데 검붉은 매화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4대 매화 가운데 유일하다. 그래서 흑매라고도 불린다.
대웅전 뒤편 구층암석탑과 나무의 결과 옹이까지도 그대로 살아있는 오래된 승방을 돌아보고 대나무숲 사잇길로 내려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들매화를 만났다.
대웅전 뒤편 나무의 결과 옹이까지도 그대로 살아있는 오래된 승방
보통 매화나무는 꽃이 예쁜 나무를 골라 접을 붙여 번식한다는데 이 들매화는 사람이나 동물이 매실을 먹고 버린 씨앗에서 싹이 터 자란 수령 450년 된 매실나무에서 해마다 이맘때 꽃이 핀다. 그래서 야매(野梅)라고 부른다.
일반 매화 보다 작고 듬성듬성 피어 화려한 맛은 덜하지만, 고즈넉한 대나무 숲속에 은은히 풍기는 꽃향기와 단아한 기품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들매화를 눈으로 한 번 보고 향기로 맞고 마음으로 읽으면 나와 네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들매화
화엄사 홍매화는 조선 숙종 연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각황전과 원통전을 중건한 계파선사가 중창 불사를 기념해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세워진 자리는 단순한 식재의 자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시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마음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삼백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홍매화는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오래된 기도의 숨결을 다시 피워 올리듯 꽃을 틔워왔다.
아름다움이란 이렇게 오래 지속되며 사람의 발걸음을 이끄는 힘이 아니겠는가. 국가유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날,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이 대중 스님들과 함께 나무 앞에 예를 올렸다는 이야기는, 한 그루 나무가 이미 수행의 자리에 들어와 있음을 말해준다.
봄날의 화엄사에서 만개한 홍매화를 마주하면 절로 “아!” 하는 탄성이 새어나온다. 그 순간 말은 쓸모를 잃고, 감탄은 언어보다 먼저 피어난다. 모든 설명을 멈추게 하는 고요한 충만,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이 가진 가장 깊은 힘일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마음을 흔드는 힘이 또 있을까.
삼백 해를 넘긴 고목이 여전히 꽃을 피워낸다
봄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세계의 맥박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한 계절의 개화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갱신하는 우주의 약속이다. 그 약속이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발 딛고 선 지구는 축복의 별이라 불릴 만하다.
삼백 해를 넘긴 고목이 여전히 꽃을 피워낸다는 사실은, 시간의 다른 결을 보여준다. 인간의 시간은 소모되며 앞으로 밀려가지만, 나무의 시간은 축적되며 다시 피어난다. 늙어간다는 것이 끝을 향해 가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홍매화는 해마다 자신의 몸으로 증명한다. 오래된 줄기에서 다시 태어나는 꽃처럼, 생명은 스러짐 속에서도 끊임없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나무의 시간이다.
인간의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가지만, 나무의 시간은 해마다 되돌아오는 꽃의 방식으로 순환한다. 늙어가면서도 새 생을 피워 올리는 힘, 그것은 쇠퇴가 아니라 깊어짐에 가깝다. 어쩌면 산에 오른다는 일도 그와 비슷할지 모른다. 반복되는 걸음 속에서 조금씩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일, 오래된 것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숨을 만나는 일. 그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은 풍경이 아니라 물음이 되고, 산은 높이가 아니라 시간의 층위로 다가온다. 이제 그 겹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듯, 화엄의 길 앞에 선다.
겹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듯, 화엄의 길 앞에 선다
화엄(華嚴)에 오르다
김명인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산문(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운판(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구절양장(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오르게 하는가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부호로 꼬부라져 우화등선(羽化登仙)해 버린 듯 앞선 일행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림처럼
이 허방 허우적거리며 여기까지 좇아와서도
나는 정작 내 발의 티눈에 새삼스럽게 혼자 아픈가
길섶 풀물에 든
낡은 경(經)소리 한 구절 내내 떨쳐버리지 못해
시큰대는 발자국마다 마음 질척거리는데
화엄은 화음 속에 얼굴 감추고 하루종일
굴참나무 잔가지에 얹히는 경전(經典)을 들어 나를 후려친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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