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아니었던 한때 있나
모든 애인은 꽃이었고, 다른 애인이었고
가슴 뛰던 사랑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조등(弔燈)
이규리
〈정사〉라는 영화가 있었다
동생의 애인이나
혹은 친구의 애인
모든 애인은 꽃이었고
다른 애인이었고
창가 사루비아꽃에
온몸이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한 꿀벌
날개 파르르 떨더니 이내
볼펜으로 건드려도 무덤덤하다
제 살던 자리를 죽는 자리로 이었으니
한 우주가 죽음을 빨갛게 덮어주었구나
미리 조등을 걸었구나
달콤했던 때 없지 않았으니
기막히게 좋을 때 죽고 싶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 잠시
해 지는 줄 모르고
너무 멀리 차지하려다 돌아오지 못한 보폭이 있지
가랑이가 찢어진들 지는 해를 쫓겠는가
꽃 아닌 애인 있나
애인 아니었던 한때 있나
붉은 치마 속에 코를 묻은 단잠
흔들지 마라 그 길 고요히,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2014)
이미숙과 이정재가 주연한 우리나라 영화 〈정사〉포스터이규리의 「조등」에 나오는 〈정사〉가 특정 한 편의 영화로 단정되지는 않은 듯하다. 지금까지 공개된 평론이나 자료에서도 “어느 감독의 어떤 〈정사〉”라고 명시된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시의 문맥과 한국 영화사 맥락을 보면, 몇 가지 중요한 힌트가 있다. 시 속 “동생의 애인 / 혹은 친구의 애인”이라는 구절은 이미숙과 이정재가 주연한 우리나라 영화 〈정사〉의 핵심 구조와 매우 닮아 있다.
처제와 형부(혹은 언니의 남편) 사이의 금기적 관계 가족 내부의 ‘넘어서는 사랑’, 욕망과 죄의식, 죽음 충동까지 이어지는 정서를 주제로 한 이 영화는 한국에서 “정사”라는 단어를 금기적 사랑의 상징으로 굳혀놓은 대표작이다.
시인이 굳이 특정 설명 없이 “〈정사〉라는 영화”라고 썼다면 1998년 한국영화 〈정사〉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숙과 이정재가 주연한 우리나라 영화〈정사〉의 한 장면.처음 본 순간부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기 시작한 서현과 우인. 결혼 준비를 위한 만남을 거듭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그러나 감정을 애써 숨기던 서현은 오후 햇살처럼 스며드는 우인의 사랑에 그와 하나가 되고 만다.
오락실, 아이의 학교 지구과학실 등에서 은밀한 정사를 벌이는 두 사람. 하지만 미국에 있던 지현이 돌아오면서 혼란은 더해가고 우인과 서현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줄 알면서도 파멸을 향해 치닫는데.
당시 이미숙(37)과 이정재(26)의 11살 차이의 19금 멜로 영화로 엄청난 화제가 되어, 서울 관객 70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한 작품이다.
이규리 시의 특징 중 하나가 구체적 명칭을 쓰되, 그것을 개념으로 확장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여기서의 〈정사〉는 하나의 특정 영화라기보다 “금지된 사랑의 전형적 이미지 묶음”으로 보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 이 시에서 더 중요한 건 영화의 구체적 줄거리보다, “정사”라는 말이 가진 이미지의 층위다.
시를 보면 “모든 애인은 꽃이었고 / 다른 애인이었고” “제 살던 자리를 죽는 자리로 이었으니” “미리 조등을 걸었구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즉, 이 시의 핵심은 사랑 = 꽃 = 죽음으로 이어지는 감각적 은유다. 여기서 “정사”는 금기, 격렬한 욕망, 파국, 죽음의 예감을 한 번에 불러오는 문화적 코드로 쓰인 것이다.
〈정사〉로 번역 개봉된 베를린영화제 수상작 〈Intimacy〉포스터
〈정사〉라는 영화는 많다.
한국에서 〈정사〉로 번역 개봉된 〈Intimacy〉(2001)는 베를린영화제 수상작이다.
섹스를 할 수 있는 단 하루,
매주 수요일마다 그녀를 만난다.
적막한 오후. 한 여자의 노크 소리가 남자의 낮잠을 깨운다. 뮤지션이었던 남자의 이름은 ‘제이’.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져 지금은 바텐더로 일하면서 혼자 살고 있는 그는 매주 수요일마다 찾아오는 그녀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게 둘은 수요일마다 만나 섹스를 나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격렬한 몸짓으로...
그러던 어느 수요일. 여자는 어김 없이 섹스가 끝나자 황급히 문을 나선다. 암묵적인 약속을 깨고 갑자기 여자의 뒤를 몰래 따라가기 시작하는 제이.
그는 여자가 사라진 극장 안으로 이끌리듯 들어선다. 조용히 객석에 앉은 제이의 눈을 사로 잡은 것은 연극 무대에 선 여자, 바로 그녀다. 그리고 옆 자리에 앉은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그녀의 이름이 '클레어'라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이름도 모른 채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관계 감정 없는 육체 관계는 점점 집착과 파괴로 이동하면서 사랑이라기보다 공허와 중독된 정사로 변한다.
〈세 가지 사랑, 정사〉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영화〈Damage〉포스터
한국 개봉 제목 〈세 가지 사랑, 정사〉로 알려진〈Damage〉(1992)는 줄리엣 비노쉬,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 괴르쯔 스필레만 감독 영화다.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상영된 바 있는 이 오스트리아 영화는 각종 영화제와 자국 개봉당시 실제 정사 여부로 논란이 됐다. 이 영화의 시사회 상영 버전은 영화제와 아시아 지역 개봉 및 자국에서 개봉됐던 무삭제 버전이었는데 배우들의 실연 여부가 관객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세 커플의 얽히고 설킨 사랑을 그린 수위 높은 노출과 적나라한 정사 신으로 눈길을 끈 이 작품에서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된 장면은 중년 남녀의 불륜을 그린 첫번째 에피소드다. 각자 가정이 있음에도 불륜에 빠져든 남녀의 정사 장면을 묘사함에 있어 영화는 가감없고 적나라한 방법을 취했다.
남자 주인공 안드레스 파톤의 성기 노출과 구강 성교 장면 등 충격적인 영상이 이어지며 실연을 의심케 할만큼 수위 높은 정사 신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세 가지 사랑, 정사〉로 알려진〈Damage〉의 한 장면.
스토리는 아버지(제레미 아이언스)가 아들의 약혼녀(줄리엣 비노쉬)와 관계를 맺으면서 가족 전체가 붕괴되는 이야기다.
아들의 연인과 관계를 맺는 남자의 욕망이 가족 전체를 붕괴시키는 비극은 사랑이 아니라 파괴적 집착임을 시사한다. 단순한 불륜이 아니라 욕망이 어떻게 삶을 ‘손상(damage)’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사랑이 아니라 재난”에 가까운 정사 영화다.
직접 제목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정사적 정서’로 자주 묶이는 작품 〈In the Mood for Love〉(2000)도 있다.
〈화양연화〉로 국내 개봉된 〈In the Mood for Love〉의 한 장면.
〈화양연화〉로 국내 개봉된 이 영화는 왕가위 감독 작품으로 서로의 배우자가 외도 중이라는 사실로 시작한다. 정사를 하지 않지만, 억제된 감정, 시간 속에 증발하는 사랑을 “이루어지지 않는 정사”라는 역설로 표현하기 때문에 더 강렬한 정사 영화다.
“정사”라는 제목은 사실 하나의 장르처럼 작동한다. 공통된 핵심은 이렇다. 정상적 관계를 벗어난 사랑, 욕망과 죄의식의 동시 작동으로 결국은 파국, 소멸, 혹은 결핍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이규리 시의 “〈정사〉라는 영화”는 특정 작품 중 하나라기보다 여러 영화가 축적해놓은 ‘금기적 사랑의 기억 덩어리’라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하다.
꿀벌–꽃–죽음 이미지가 어느 영화와 어떻게 겹치는지 찾아보면 궁금증은 꽤 흥미롭게 풀린다.
꽃 아닌 애인 있나. 애인 아니었던 한때 있나. 몸으로 시작된 관계는 결국 감정으로 변질되거나, 감정을 끝내 거부하다가 파괴된다. 붉은 치마 속에 묻힌 단잠은 깨어나는 순간 사라진다. 흔들지 말라는 말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다. 고요하다는 말은 고요가 깨지기 직전의 상태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흔적이다. 지나간 몸의 온도, 닿았던 숨, 그리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수요일의 공백.
조등은 죽은 뒤에 켜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가고 있을 때 켜진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서히 꺼지고 있는 관계 위에 걸린 작은 빛. 그 빛은 애도의 신호이면서 동시에 기억의 표식이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이 영화는 끝나기 전부터 이미 끝을 알고 있는 관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더 적막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의 무게다.
영화〈세 가지 사랑, 정사〉의 한 장면.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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