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독일을 통일시킨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정직이야말로 최선의 외교 정책”이라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듯하다. ‘악마의 사전’을 쓴 비어스가 “외교란 조국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애국적인 행위”라고 말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교술이란 가장 은근한 방법으로 가장 음흉한 일을 행하는 것”이라든가, “외교관을 속이려면 진실을 말하라. 그는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까지 있을 정도면 외교란 무엇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국어사전을 보면 외교사령(外交辭令)이란 ‘자기의 감정을 감추고 교묘하게 상대방의 감정을 조정하여 상대편에게 호감을 주는 사교적인 말. 겉치레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실제로 외교 교섭에서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논쟁을 벌였다’는 뜻이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피력한데 그친 것을 뜻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회담이 잘 돼 구체적인 성과가 있다면 곧바로 성과를 발표하지 구태여 이러한 수사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
이러니 외교에서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불리하다 싶으면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부인하거나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발뺌을 하기 때문이다. 비망록(備忘錄·Aide-Memoire)이니 구상서(口上書·Note Verbale)니 난 페이퍼(Non-Paper)니 하는 외교문서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금씩 격은 다르지만 모두가 말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취지다.
정부가 일본 정부에 왜곡 역사교과서의 재수정을 요구하며 전달한 것이 비망록이다. 외교통상부 장관이 일본대사를 불러 재수정 요구 취지를 구두로 전달했으나 일본이 나중에 딴 소리를 할까 싶어 잊지 말라고 다짐하기 위해 문서로 만든 것이다. 왜곡 역사교과서에서 보듯 과거의 잘못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딴 소리를 해대는 일본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역사 비망록인지도 모른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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