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장소 ⑳] 우리들의 박기영 군과 심지다방의 추억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5-08 13:00

매일신문신춘문예에 옥중 당선된 박기영의 일화

1970~80년대의 대구문학은 골목과 다방에서 자랐다

청춘들의 문장과 심지다방의 불 꺼지지 않은 심지

문학청년들과 문인들의 사랑방 시인다방으로 이어져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 일


박상봉


 사람을 그리워하며 산다는 그 일 얼마나 큰 즐거움인 지 몰라 수풀 속을 기어간 뱀의 흔적처럼 소문 한 장 남김 없이 떠난 사람 잊지 않고 가끔 생각한다는 그 일 


  창틀에 턱을 괴고 앉아 살아온 세월만큼 야위어진 갈매나무 가지를 바라보는 동안 나뭇잎 뒷면에 숨어 불쑥 얼굴 내밀 것 같은 노란색 꽃잎 같은 사람, 나 여기 있었어 키득키득 농을 건네며 다가와 손잡아 줄 것 같은 기대에 가슴 설레는 그 일


낮달이 꼬리를 감추며 서산마루 넘어 갈 때 유리창 두들기던 바람 눈물 몇 방울 손등에 떨궈오면 다시 추억의 긴 그림자 끌고 길을 나설지도 몰라


  집 앞 골목 어디쯤 곰팡내 나는 고서점 구석진 자리, 바바리 코트 짧은 깃에 목을 파묻고 먼지만 남은 책들을 뒤적이고 있을 구겨진 그를 발견하게 될는지도 몰라


박기영 시인(사진=박상봉 기자)내 친구 박기영 시인을 생각하며 쓴 시이다. 그는 불알 친구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나의 절친이다.


장정일 시인의 스승으로 알려진 박기영, 장정일 시인이 「삼중당 문고」라는 작품에서 <박기영 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라고 쓴 그 시에 나오는 시인 박기영이다.


나는 그를 고등학교 시절에 대구 중앙로 YMCA 복도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됐는데 ‘학교에서 배울 것이 없어 중퇴했다’고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퍽이나 의외로운 친구로 받아들인 기억이 난다. 


나는 사실 58개띠지만, 그의 억지에 끌려 ‘59문학회’에 가입하게 됐고, 그의 이끌림을 따라 이문재, 안재찬(류시화), 하재봉, 김영승, 이윤택, 이중기, 정일근, 백학기, 이산하 등등 전국의 이름난 시인묵객들을 문청시절부터 만나 교류하는 행운도 누렸다. 그를 따라 안도현 장정일 시인 등과 『국시』 동인을 결성하여 문단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본격적인 작품 발표도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화가가 꿈이었던 우리들의 박기영 군이 물감과 캔바스를 버리고 문학에 입문하여 매일신춘문예로 등단하기까지 이른바 문청시절을 그와 나는 중앙파출소 옆 「심지다방」에서 주로 시간을 떼우면서 보냈다.


당시 대입 재수생이었던 나는 지겨운 학원에서 자주 뺑소니쳐 심지다방으로 가서 그와 함께 노닥거렸다. 우리는 곧잘 토론했다. 그때는 문단 이야기와 어느 잡지에 발표한 누구의 시에 대한 강평을 나누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집에서는 아예 내어놓은 자식으로 취급당했던 우리는 심지다방이 집보다 더 따뜻한 보금자리였고, 우리가 토론하는 문학 혹은 시는 상처 입은 청춘을 보듬어주는 최고의 처방인 동시에 입시 보다 더 확실하게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희망봉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그 다방에조차도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심할 경우에는 욕을 얻어먹기도 하였다. 생각해보라, 커피 한잔 시켜놓고 종일 뭉기적거리며 똥폼이나 잡는 까까머리 청년들의 철없는 작태가 얼마나 꼴사납고 가련해 보였겠는지. 그나마 찻값이 없는 날도 있어서 엽차만 축내고 나오는 날은 틀림없이 머리뒷꼭지에 한바지 욕을 뒤집어썼다.


내가 나중에 「시인다방」을 운영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나는 줄곧 ‘박기영 군처럼 가난한 시인들이 차값이 없어서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시인들을 위한 다방’을 구상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보잘 것 없는 자본금으로 경험도 없이 과감하게 문학다방을 차리는 모험을 시도하였다.


대구지역 문학청년들과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냈던 「시인다방」전경.

「시인다방」은 문학의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암울했던 그 시절 대구지역 문학청년들과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냈던 곳이다.


박기영 군이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옥중 당선된 기막힌 일화는 지금도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사실 박기영君의 필체는 본인도 알아먹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악필 중의 악필이었다.


예심을 보던 심사위원들이 읽지도 않고 멀찍이 던져놓은 것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신문사 선배가 발견하고 다시 정서를 해서 예심을 통과시켰다. 어쩌면 쓰레기통으로 곧장 들어갈 뻔한 작품이 우여곡절 끝에 본심까지 올라가 어렵게 당선되었는데 당선 통지를 받아야할 본인은 정작 연락이 닿지 않았다.


박기영 군은 당시 대구 50사단에서 군복무 중이었는데 문우 손태도가 신춘문예 당선통지서를 들고 면회를 갔더니 무슨 사고를 쳐서 영창에 가 있었다. 신춘문예 당선의 위력은 군대에서도 통해 중대장의 특별한 배려로 그는 곧바로 영창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박기영 군은 언제나 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이었고, 가는 곳마다 충격적인 일을 벌였다. 일을 벌이는 것은 잘했지만 뒷수습은 언제나 내 차지로 남아 당황스러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는 또 내 궁핍한 주머니를 심심찮게 털어갔다. 그가 먹은 밥값과 술값은 늘 내 몫이 되었고, 「시인다방」 단골손님이었을 때도 하루종일 바둑만 두면서 개개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면 커피 값은 달아놓고 돈까지 뜯어가기 일쑤였다.


 과거지사를 죄다 따져본다면 나는 아마 박기영 군을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장본인으로 손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밥과 술을 얻어먹은 적도 있다. 오랜만에 한턱 쏘겠다고 해서 따라가면 신춘문예 시상식장이거나 어느 시인의 출판기념회 장소였지만 어쨋든 그의 덕에 공짜 밥과 술을 먹은 것은 사실이다.

 

그로 인해 어떤 피해(그래봤자 대부분 경미하고 장난끼로 빚어진 작은 사건이었지만...)를 당하고 나서는 ‘때리 쥑이고 싶도록’ 미운 적도 몇번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로 인해 당황스럽고 곤란했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쉽게 가라앉고 좌충우돌했던 일이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또다시 그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1970~80년대의 다방 풍경누군가는 말했다. 대구 문학은 골목과 다방에서 자랐다고. 실제로 1970~80년대의 지역 문학은 대학 강단보다 다방 테이블 위에서 먼저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동인지 창간 회의도, 낭독회 뒤풀이도, 선배 시인에게 원고를 보여주는 순간도 대부분 다방에서 이루어졌다. 심지다방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비밀 학교 같은 곳이었다. 정식 교과서는 없었지만, 서로의 상처와 문장이 교재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동성로는 점점 밝아졌다. 네온은 더 커졌고, 프랜차이즈 카페가 골목마다 들어섰다. 음악감상실은 사라졌고, LP 대신 이어폰이 사람들의 귀를 점령했다. 심지다방도 어느 날 흔적 없이 문을 닫았다. 지하 입구가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 많지 않다.


그러나 어떤 장소는 없어져도 문학사 속에서 계속 살아남는다. 심지다방은 단순한 찻집 이름이 아니라, 한 시대 청춘들의 문장과 담배 연기와 패배감과 사랑이 뒤섞였던 상징이 되었다. 지금도 오래된 시집의 첫 장을 넘기면 어딘가에서 희미한 커피 냄새와 지하의 눅눅한 공기가 따라 나오는 듯하다. 아마 그 냄새 속에는 아직도 심지다방의 불 꺼지지 않은 심지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옛 심지다방 위치 추정도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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