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의 신작 중편소설 '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 펴내
유년의 기억서 길어 올린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는 이야기"
"문학과 예술은 진짜 삶을 살고 싶게 각성시키는 힘 있어"
소설가 전경린 [작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이번에 저는 쓰지 않으려고 꽤나 버텼습니다. 내 안에 자리한 형상을 짐작하면서 모르는 척 미적대며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소설가 전경린(64)의 중편소설 '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에 실린 '작가의 말' 가운데 일부다.
전경린이 4년 만에 펴낸 신작으로, 김영사에서 선보이는 첫 번째 한국 소설선 '올-타임'의 처음을 장식하는 책이기도 하다.
작가는 연합뉴스와 서면 인터뷰에서 "새 책을 받을 때면 늘 마음이 한바탕 출렁거린다"며 "이번엔 작고 예쁜 책인데도 '올-타임' 시리즈 기획의 첫 책이어서 마음이 가볍지 않다"고 운을 뗐다.
작가에게 작품을 쓰지 않으려 버텼다는 이유부터 물었다.
전경린은 "나의 근원적인 행복감을 아무도 모르게 나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썼을 때 그저 옛날이야기나 감상적인 향수에 지나지 않는 소설이 될까 봐 많이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밀한 유년의 기억에서 길어 올린 작품인지라, 쓰고자 하는 의지만큼이나 마음속 혼자 간직하고픈 욕망도 컸다는 것이다.
그는 또 "한동안 아무 글도 쓰지 않기 위해 실제로 버텼다"고 강조했다.
"제 나이가 되면 그렇지만, 삶이 크게 바뀌지요. 그런 사이에 많은 언어들이 나를 떠나기도 하고, 그만큼 고요해지기도 했어요. 계속해서 쓰는 것도 좋지만, 더 이상 쓰지 않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그러면서 제가 존재의 바닥까지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그때 보게 된 것이 이번 소설의 소재가 된 빛으로 가득한 유년의 한 장면이었다"고 설명했다.
"저 멀리 어린 시절에 묻어두었던 보석의 황금빛 광휘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해. 그때 그 아이가 정말 나였을까, 내가 정말 그 아이였을까?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내 안의 어딘가에서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12쪽)
◇ 작은 시골 마을 배경으로 가족과 사랑, 공동체 의미 탐구
1995년 문단에 등장한 전경린은 인간 내면의 욕망과 결핍, 사랑과 고독, 여성의 삶과 존재를 깊이 파고들며 자신만의 독보적 문학 세계를 구축해왔다. '귀기의 작가', '정념의 작가'로도 불렸다.
신작은 그간 작가가 선보여온 소설 세계와는 사뭇 결이 다르다. 온갖 자극이 넘쳐나는 오늘날의 세태와도 멀리 벗어나 있다.
작품의 배경은 온통 감꽃으로 덮인 흙길을 지나 도달한 작은 마을.
작가는 '새별이'라는 어린아이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포탄에 정신을 놓은 '복덕이',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 '희조 아재', 아이를 낳지 못한다며 쫓겨난 '순자 이모', 여섯 살 난 아이를 떼놓고 집을 떠나야 했던 '봉연이 할매' 등 전쟁과 시대의 상처를 간직한 이들의 신산한 삶이 펼쳐지며 사랑과 공동체의 의미를 묻는다.
전경린의 오랜 독자라면 낯설다 싶을 수도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작가는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편안해졌다는 정도"라며 "문학에 대한 자의식에 얽매여 있었다면, 소설 전체에서 경상도 방언을 구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 자의식으로부터 풀려남으로써 '작가의 말'에 적은 것처럼 "웃음을 머금게 하는 이야기, 반짝이는 이야기, 편안한 이야기,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는 이야기"가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 [김영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낙원은 풍부해서 넘치는 곳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적은 곳"
작가는 제목에 담긴 '낙원'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정의를 내렸다.
"낙원은, 뭐든 풍부해서 넘치는 곳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적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먹는 것, 입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이 너무나 간단하고 소박하고 적기 때문에 유년 시절은 낙원입니다. 더구나 풍요로운 자연의 선물이 쏟아지는 깊은 시골에서 보낸 꿈같이 짧은 한 시절이니까요."
다만 작품 속 마을이 마냥 평화로운 곳은 아니다.
전쟁이 끝난 마을은 가난하며, 전쟁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새별이의 마음도 외로움과 결핍으로 가득하다. 맹랑하면서도 속 깊은 꼬마 새별이가 세상을 마주하고, 타인의 손길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상실을 예감하는 순간들이 절제된 감정으로 다가온다.
"봉연이 할매는 새벽에 나가 풀숲 사이에서 밤사이 떨어진 홍시를 주운 것이었다. 누런 박 바가지 안에 든 홍시 세 개가 불을 켠 듯 환했다. 세상이 사라진 듯한 충격 뒤에, 홍시가 그 텅 빈 세계를 메우는 순간이었다. 오직 홍시 세 개와 봉연이 할매가 세상의 전부였다. 그 둘은 영원히, 절대로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약속처럼 새별이의 마음을 채웠다."(78쪽)
작가는 "이 소설이 아픔이나 슬픔, 연민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마음을 썼다"며 "상처가 뻔히 눈에 보여도 보이는 대로 두고, 발밑에 눈물로 고인 웅덩이들이 도처에 있어도 마른 땅을 골라 딛으며 끝까지 흙물에 젖지 않으려 했다"고 집필 과정을 돌아봤다.
130쪽을 넘지 않는 짧은 분량이지만 작품은 긴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동안 몽글몽글한 감흥이 피어오르는 작품이다.
올해로 데뷔 31년을 맞은 작가게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어떤 이유로 살아 있다는 감각을 잃을 때, 자신이 진짜 삶을 잃고 부유한다고 느낄 때 문학을 찾게 되지요. 문장들 위에 자기의식을 내려놓으며 독서하는 동안 책을 통해 자신을 만나고 스스로에 대한 집중력과 새로운 구성력을 얻는 것 같아요. 문학과 예술은 진짜 삶을 살고 싶게 각성시키는 힘이 있어요. 저로서도 늘 어렵지만, 저는 그런 게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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