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정기를 지키는 숲
삼풍대 효열비
삼풍대 숲길에 들어서면 먼저 나무들이 만든 오래된 그늘이 찾아오고, 그 그늘 속에서 마을의 시간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서읍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물길이 북쪽으로 흐르는 지형이라는 사실은 자연의 질서일 뿐이지만, 옛사람들은 그 지형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의 흐름을 읽어냈다. 물이 북쪽으로 흐르면 정기 또한 그리 흘러 마을의 복을 앗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을 다스리기 위한 지혜가 조산(造山)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삼풍대 숲의 기원 역시 그 오래된 자연관과 믿음 속에서 시작된다.
삼계마을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숲을 세우고, 그 숲에 ‘삼계의 삼(三)’과 마을 평안을 기원하는 ‘풍(豊)’을 합쳐 삼풍대라 이름 붙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약 200여 평의 숲은 단지 조경이 아니라, 바람의 방향을 다스리고 재앙을 마을 바깥으로 돌리며,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던 동구의 역할까지 맡아온 살아 있는 마을의 경계였다. 바람을 막는 방풍림을 넘어, 삶과 삶이 스쳐 지나던 통로이자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마당인 셈이다.
칠월백중과 칠월칠석에 이어져 온 마을잔치는 그 숲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하나의 기원을 이루던 시간이었다. 농사를 짓던 손들은 잠시 쟁기를 놓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풍농과 무탈을 기원하며 숲 아래에 모여 살림살이의 겹겹을 나누었다. 전쟁으로 피난을 떠났던 기억마저도 이곳에서 되살아났고, 다시 모인 사람들은 숲의 그늘 아래서 비로소 마을의 시간을 이어 붙일 수 있었다. 숲은 단지 식물로 이루어진 생태적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의 상처와 화해, 기억과 희망을 품어온 그릇이었다.
임진왜란의 나날 속에서 이 숲의 나무들이 베어져 세병관과 거북선의 구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역사의 폭력은 생명 있는 것들에게서 흔적을 남기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어려웠던 나무들이 남아 오늘의 삼풍대를 이루었다. 굽고 작아 쓸모가 없다고 여겨졌던 나무들이 오히려 마을의 역사가 된 아이러니는, 우리가 지나온 세월에서 얼마나 많은 ‘작고 굽은 것들’을 놓쳐왔는가를 되묻게 한다. 큰 힘과 위용을 지닌 존재만이 역사를 만든다고 믿었던 생각을 이 숲은 조용히 거부한다. 오랜 세월을 비틀리며 견뎌온 느티나무와 팽나무야말로 공동체의 숨결을 지켜낸 진정한 주역이다.

오늘 삼풍대에는 30여 그루의 노거수가 서 있다. 말채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나 세월은 사람뿐 아니라 나무에도 균열을 남기고, 관리와 보존은 마을의 기원만큼이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보호수 지정과 체계적 관리가 절실한 이유는 단순히 자연 보존 차원이 아니라, 이 숲이 이미 한 마을의 세계관과 공동체의 윤리, 그리고 수백 년의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지키는 일은 과거를 기념하는 일이자, 후대가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남기는 문제다.
삼풍대에 모여 있는 효열비 또한 이 마을이 지켜온 가치의 편린이다.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삶을 곧게 살려 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돌에 남아 있는 것은, 숲이라는 자연유산과 돌이라는 기록유산이 한 자리에서 공동체의 도덕을 이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새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흩어질 뻔한 비석들을 이곳으로 옮겨 보존한 것 역시, 단순한 이전이 아니라 마을의 기억을 한곳에 수렴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숲은 한 마을의 이야기지만, 더 넓게 보면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이해하고 공존하며 문명을 익혀 왔는가를 보여주는 작은 역사이기도 하다. 자연의 기운을 두려워하던 시절부터, 자연을 통해 공동체를 세우고, 전쟁 속에서도 살아남은 생명에게 감사하며, 다시 그 생명을 후대에 남기려는 지금까지. 삼풍대는 단순한 숲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자연의 리듬이 서로를 지탱해온 긴 시간의 집합체다.
숲은 말을 하지 않지만, 나무가 기울어진 방향, 얽히고설킨 뿌리, 오래된 둥치의 상처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삶이 고요히 새겨져 있다. 그 숲길을 걸으면,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 또한 그 긴 역사 속 한 부분임을 깨닫게 된다. 삼풍대를 지키는 일은 곧 우리가 서 있는 땅의 의미를 지키는 일이며, 자연과 사람이 서로에게 남긴 수많은 흔적을 기억해내는 일이다.

시와늪문인협회 대표 배성근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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