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펼치니 작고 흰 것들이 우루루 손 안으로 날아든다
당신은 누구의 첫눈입니까
가슴이 아파 이 편지는 차마 보내지 못하겠어요
영화《러브스토리》의 가장 유명한 명장면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누구인가 스쳐 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표지
이규리 시인은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당신은 첫눈입니까』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가 있고, 시적 순간을 담은 산문집으로 『시의 인기척』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가 있다.
이규리의 시 「당신은 첫눈입니까」에서 첫눈은 확인할 수 없는 감정의 형식이다. 스쳐 지나갔는지, 정말로 닿았는지 알 수 없는 마음. 그래서 이 시에서 첫눈은 계절의 사건이 아니라, 이름 붙이기 직전의 감정 상태에 가깝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는 문장은, 첫눈이 남긴 흔적이 아니라 흔적이 될 뻔한 가능성을 말한다. 오늘 같은 폭설은, 그런 부질없음이 한꺼번에 현실로 쏟아지는 날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영화 《러브레터》가 떠오른다. 일본의 이와이 슌지 감독이 자신의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한 영화 《러브레터》는 샷포로, 오타루 지역의 설원을 배경으로 빼어난 영상미와 섬세한 연출로 최고의 멜로 영화라는 평을 받은 첫사랑을 생각나게 해주는 영화이다.
영화《러브레터》2016년 재개봉 포스터
영화의 핵심은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끝난 사랑을 향한 잘못된 편지 한 통이다. 히로코는 죽은 연인 이츠키를 그리워하며 그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답장이 올 리 없다고 믿었던 편지에, 다른 ‘이츠키’—같은 이름을 가진 여인—의 답장이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때부터 영화는 묻는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혹은 내가 사랑했다고 믿은 기억은 누구를 향해 있었는가.
눈 덮인 오타루에서 날리는 눈은, 이규리의 시에서 말하는 “형식을 갖지 않은 허공”과 닮아 있다. 눈은 모든 것을 덮지만, 아무것도 고정하지 않는다. 히로코가 외치는 “오겡끼데스까”는 상대에게 닿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던지는 말이다. 마치 시 속의 질문처럼—당신은 첫눈입니까—대답을 기대하지 않기에 가능한 질문. 그래서 이 영화의 사랑은 현재형이 아니라 지연된 과거형이다. 첫눈처럼 왔으나, 녹지 않고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사랑이다.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
반면 《러브스토리》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의 핵심은 너무 유명한 문장—“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시간 앞에서 어떻게 소진되는가에 있다. 올리버와 제니퍼는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이 첫눈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는다. 이미 사랑 속에 들어와 있고, 그것을 삶으로 밀어붙인다. 하지만 결국 병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사랑은 더 이상 서사가 아니라 상실의 형태로만 남는다.
눈 내리는 하버드의 겨울 장면에서, 올리버는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본다. 그 장면의 눈은 첫눈이 아니다. 이미 너무 많이 내려, 더 이상 새롭지 않은 눈이다. 이규리의 시에서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고 말할 때의 흰색과 닮아 있다. 사랑이 끝까지 가버린 뒤에 남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색감처럼 남은 여백이다. 그래서 《러브스토리》의 눈은 시작이 아니라 마침표에 가깝다.
이규리의 시가 특별한 이유는, 이 두 영화의 중간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러브레터》처럼 아직 확인되지 않은 감정의 흔들림을 품고 있으면서도, 《러브스토리》처럼 끝까지 가버린 마음의 무게를 이미 알고 있다.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라는 구절은, 사랑이 너무 선명해져서 오히려 이름 붙일 수 없게 되는 순간을 말한다. 첫눈은 그래서 늘 뒤늦게야 첫눈이 된다.
대구에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가운데 종일 굵은 눈발이 쏟아져 도심 전체가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때늦게 내린 폭설을 보며 첫눈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와 영화들이 말하는 첫눈은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이름 붙여지는 감정, 말하지 않았기에 오래 남은 마음, 부질없어서 더 오래 붙들게 되는 허공이다. 그래서 시는 끝내 다시 묻는다. 눈을 보며 묻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관계를 향해 묻는다.
당신은 누구의 첫눈입니까.
영화《러브레터》의 한 장면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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