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과 평화

7080세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공·방첩 논리는 절대적 규범이었다. 일상의 모든 상황이 냉전이라는 필터로 구분됐다. 20대를 지나면서 잠깐은 이에 저항하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수 년 후 워싱턴을 무대로 레이건과 조지 부시, 고르바초프가 '냉전의 끝'을 연출한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냉전이 알려준 평화의 조건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지구촌의 길고 긴 냉전은 역설적으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처럼 100만명이 넘는 미군 사상자를 내지 않고 냉전에서 승리했다. 냉전의 설계자들은 국가 미래를 위해선 고립이 아닌 개입해서 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군사력의 주된 목적은 전쟁을 억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쟁부가 아니고 국방부였던 것이다.
또 냉전의 설계자들은 세계를 이끌어가는 유일하고 지속적인 리더십은 자발적인 추종을 통해서만 나온다는 걸 파악했다. 반대로 러시아는 위성국가들을 강압적으로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넣었다. 결국 이들의 반발이 소련 몰락의 단초가 됐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대부분 자발적이다. 그리고 그 자발성은 공동 번영에서 나왔다. 미국이 무상원조를 늘리고 무역장벽을 낮춰온 이유다. 냉전 종식의 도화선이 베를린에서 타오른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장벽 너머의 세상이 더 밝았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사력 사용 목적에 대한 초당적 합의를 찾아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잠재적 침략자에 대한 억지력, 동맹국과의 협력, 민주주의 국가의 보호, 지구촌 공공재의 안전과 안보, 전쟁법을 준수하는 일. 이런 국제적 규범에 대해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을 막론하고 뜻을 같이해왔다. 요컨대 가능한 한 전쟁을 예방하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자는 것이다. 이런 미국의 외교·안보적 입장은 더 안전하고 개방적이며 규칙에 기반한 세상을 만드는 데 오래도록 기여했다.
그러나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완전히 다른 외교·안보 원칙을 내세웠다. 국방부의 이름부터 '전쟁부'로 바꿨다. 국제사회가 지켜온 교전규칙은 트럼프 미국 전쟁부가 공해상에서 소형 선박을 격침하며 가루가 났다. 트럼프 행정부는 침략자 러시아와 침략당한 우크라이나를 도덕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하면서 그 틈에서 무기 판매와 광물 거래를 통해 이익을 추구한다. 19세기로 회귀한 듯한 정복과 위협의 논리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것이 미국을 위대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심각한 오판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최근 발표한 2025년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를 확고히 했다. 국가 간 질서를 유지해온 미국의 역할을 포기한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지난 세기 미국은 최고의 승리를 거뒀다. 냉전에서 큰 성공을 거뒀던 철학과 전략을 되찾지 않고서는 미국의 이익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제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역량을 지닌 국가다.
미국이 뒷전으로 물러서면 힘의 공백이 생기고 역량이 부족한 강대국들이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미국이 물러난다면 세계는 불안정과 혼란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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