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개막한 예술의전당 토월정통연극…테네시 윌리엄스 대표작
예술의전당 토월정통연극 '유리동물원' [예술의전당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조윤희 기자 = "일어나라! 빛나야지!"
아침마다 자식을 깨우는 어머니의 매서우면서도 다정한 목소리가 무대 위에 울려 퍼진다.
하루하루가 빛나기를 바라는 습관적인 응원이지만,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아들에게는 그 한마디조차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자 벗어날 수 없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마음껏 빛나고 싶은 개인의 환상과 발목을 붙잡는 현실의 부조화를 보여주는 순간이다.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유리동물원'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각자의 환상과 열망을 품은 채 무너져가는 한 가족의 비극을 그려낸다.
지난 17일 막을 올린 이번 공연은 예술의전당이 선보이는 대표 연극 브랜드 '토월정통연극'의 올해 작품이다.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세월을 넘어 오늘날 무대 위에 소환된 윙필드 가족의 모습은 불안과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삶에서 한 번쯤 직면하는 불안과 꿈을 향한 열망, 그것이 좌절됐을 때 느끼는 깊은 절망감은 1930년대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관객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배우 배훈, 김성령, 정새별, 김경남 (왼쪽부터) (서울=연합뉴스) 조윤희 기자 = 배우 배훈, 김성령, 정새별, 김경남이 21일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연극 '유리동물원' 공연을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6.10.21 yunnie@yna.co.kr
그러나 가족 내 갈등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악의가 아닌, 역설적이게도 저마다 꿈꾸는 '행복'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 아만다 윙필드(김성령 분)는 과거의 영광에 기댄 채 자식들이 행복해지기를, 특히 자신이 가지지 못한 안정과 평온을 딸이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구두 창고에서 일하며 가정을 부양하는 아들 톰(김경남)은 시인을 꿈꾸는 순수한 욕망을 품고 있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굴레 속에서 답답한 현실에 갇혀 고군분투한다.
딸 로라(정새별)가 그토록 아끼는 유리 장식품들은 그가 숨어있는 자신만의 작고 조용한 세계를 비춘다. 빛을 받으면 영롱하고 예쁘게 반짝이지만, 조금만 부주의해도 쉽게 부서져 버리는 유리처럼, 로라의 세계는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위태롭고 취약하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이 일상적인 비극은, 외부인인 짐(배훈)이 로라의 구혼자로 등장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아만다는 로라가 드디어 결혼해 돌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차고 로라 또한 자신의 아픔에 공감해주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듯한 짐에게 빠져든다.
짐과 대화를 나누며 점점 환상에 젖어 든 로라는 평소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왈츠를 절뚝거리는 다리로 짐과 함께 춘다. 그 순간, 짐의 실수로 탁자 위에 있던 유리 유니콘이 떨어지면서 로라가 가장 아끼던 유리 장식품인 유니콘의 뿔이 깨지고 만다.
당황하며 미안해하는 짐에게 로라는 나지막이 말한다. 이제 이 유니콘도 다른 말들과 똑같이 생겼으니, 비로소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됐다고.
부서진 유리 조각을 어루만지며 하는 말은 유니콘을 빌려 말하는 자기의 이야기였다. 잠시라도 남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존재로서 세상과 어울리고 싶었던 마음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예술의전당 토월정통연극 '유리동물원' 포스터 [예술의전당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나 이 짧은 환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짐에게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윙필드 가족이 애써 붙들고 있던 희망과 환상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난다.
구원자라 믿었던 짐의 충격적인 고백은 가슴속 깊은 상처를 다시 뒤흔들고, 절망에 빠진 가족 간의 분열과 갈등은 한층 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극의 마지막, 로라가 조용히 촛불을 불어 끄며 무대의 막이 내리는 장면은 깊은 잔상을 남긴다.
몽환적인 희망과 온기, 그리고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던 촛불이 꺼지는 순간, 관객은 묵직하고 차가운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러나 그 불빛의 소멸이 오직 절망과 좌절만을 의미하지는 않아 보인다.
촛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누군가는 마침내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 답답한 집 밖으로 발을 내딛고, 또 누군가는 갇혀있던 자신만의 유리 세계에서 나와 세상으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작은 힘을 얻는다.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해피엔딩으로 볼 수도, 비극으로 볼 수도 있는 이 마침표는 관객 저마다의 삶과 시선을 바탕으로 각자의 의미를 채워 넣을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둔다.
공연은 내달 22일까지 이어진다.
